3억원짜리 ‘본드카’가 1년 넘게 꼼짝 않는 이유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8 14:00
  • 호수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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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년간 번호판 영치된 서울 차량 전수 분석…세금 누수 초래하는 '카푸어'

‘카푸어’. 몰고 다니는 자동차로 인해 생활이 궁핍해진 사람을 뜻한다. 좋다, 나쁘다는 식으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사안이다. 수입의 대부분을 차에 투자한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금까지 못 낼 정도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사저널은 최근 2년간(2018년 1월1일~2020년 3월27일) 자동차세 미납으로 번호판이 영치된 서울시 등록차량 목록을 입수했다. 총 11만 대 정도다. 이 가운데 리스차, 렌터카 등 법인 차량을 제외하면 약 10만 대가 개인 소유 차량이다. 

개인 차량 중에는 억대에 달하는 고급 수입차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벤츠·BMW·아우디 등 독일 3사는 기본이고 정식 수입되지 않는 미국 군용차 허머도 있다. 포르쉐, 페라리, 마세라티 등 슈퍼카 브랜드도 있다. ‘세계 3대 명차’도 눈에 띈다. 벤틀리가 8대, 롤스로이스와 마이바흐가 각각 2대, 1대씩 있다. 

ⓒauto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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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부터 벤틀리까지…번호판 떼인 고급차

영치 차량 소유주를 모두 카푸어로 보긴 어렵다. 트럭이나 승합차 등 이른바 ‘생계형 차량’도 있기 때문이다. 트럭은 자영업자들이 배달이나 소규모 장사에 활용하고, 승합차는 주로 통학용으로 이용된다. 지방세법에 따르면 생계와 직결된 차량은 영치의 일시 해제가 가능하다. 택시에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LPG 차량도 고려해야 한다.  

경제적 여력이 충분하지만 세금을 깜빡잊고 안 냈을 가능성도 있다. 서울시도 이를 감안해 체납 1건이면 영치 예고를 하고, 2건일 때부터 영치 집행을 한다. 영치됐더라도 소유주가 밀린 세금을 내면 번호판을 되찾을 수 있다. 총 영치 차량 가운데 절반 이상인 6만8000여 대의 소유주는 일주일 이내에 번호판을 회수했다. 

반면에 오랫동안 번호판을 떼인 채로 놔두다 뒤늦게 찾아간 경우는 다르다. 자동차세는 매년 6월과 12월에 한 차례씩 총 두 번 내게 돼 있다. 그런데 다음 납기가 돌아오는 6개월(180일)이 지나도록 번호판을 찾아가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서울 서초구의 포르쉐 박스터는 300마력을 자랑하는 오픈카다. 한때는 꼼짝 못 하는 전시품에 불과했다. 2018년 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거의 1년 동안 번호판이 영치된 적이 있어서다. 차주가 한 달 렌트비도 안 되는 83만원을 5번에 걸쳐 체납한 게 원인이었다. 번호판 없이 차를 몰면 위법이다.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서초구의 한 에쿠스는 총 67만원을 체납했고, 806일 만에야 번호판을 찾아갔다. 

번호판을 지금도 찾아가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있다. 생계형 차량과 상용차, 특수차 등을 빼도 5000여 대에 달했다. 이들 차량은 자료 집계 마지막 날(3월27일)까지도 영치 상태로 나타났다. 이 중엔 ‘카푸어들이 가장 많이 타는 차’로 통하는 BMW 3시리즈도 포진해 있었다. 

자료 집계일까지 영치된 3시리즈는 총 40대로 조사됐다. BMW 320i(중랑구)는 728일째 번호판이 없다. BMW 3시리즈는 기본 모델인 320d가 5000만원이 조금 넘는 고가의 차량이다. 단 딜러 할인을 받고 선수금을 1000만원쯤 내면 월 납입금 60만~70만원(60개월 할부)에 소유할 수 있다. 현대 쏘나타 할부금과 비슷한 수준이다. BMW는 저금리와 할인 행사를 남발한다는 이유로 “카푸어를 양산한다”는 뭇매를 맞기도 했다. 

3월6일 서울 마포구 한 오피스텔 주차장. 포르쉐 파나메라가 번호판이 영치된 채 주차돼 있다. ⓒ시사저널 공성윤
3월6일 서울 마포구 한 오피스텔 주차장. 포르쉐 파나메라가 번호판이 영치된 채 주차돼 있다. ⓒ시사저널 공성윤

곳곳에 깔린 ‘카푸어 양산차’  

또 다른 카푸어 양산차로 꼽히는 게 벤츠 E클래스다. 이 차량과 관련된 온라인 데이터를 벤츠코리아가 분석한 결과, 주요 키워드 중 하나가 ‘카푸어’였다. E클래스는 자료 집계일까지 총 75대가 영치 상태였다. 중랑구의 E300은 669일째 영치돼 기간이 가장 길었고, 관악구의 E300은 체납액이 25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한편 1년 넘게 발이 묶인 차량 중엔 벤틀리 컨티넨탈 GTC(강동구), 벤츠 S클래스 600(강남구) 등 평균가 2억원이 훌쩍 넘는 수입차도 눈에 띈다. 마포구의 1억6000만원짜리 벤츠 CLS63 AMG는 영치된 지 669일째다. 이 차량의 주인은 자동차세가 15번에 걸쳐 1260만원 밀렸다. 법인 차량을 포함해 모든 차량의 체납액 중 최고액이다. 

또 최고가 모델은 서울 용산구의 애스턴마틴 뱅퀴시다. 영화 《007》의 본드카로 유명한 이 차는 600마력에 달하는 슈퍼카다. 가격은 대략 3억4000만원. 차주는 ‘고작’ 190만원의 세금 체납으로 2018년 8월 번호판을 압류당했다. 지금도 돌려받지 못한 상태다. 2억6000만원 상당의 애스턴마틴 DB9(서대문구)은 2018년 12월 이후로 줄곧 번호판이 없다. 체납액은 210만원이다. 

수억원짜리 차를 몰면서 세금 몇백만원은 안 내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중고차 매매업체 관계자는 “처음부터 카푸어였던 게 아니라 카푸어가 된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업이 잘돼 비싼 차를 샀는데 나중에 사업 실패로 체납자가 될 수 있다”며 “이런 사람들은 자동차세보다는 건강보험료 미납으로 번호판을 압류당하곤 한다”고 했다.  

그 외에 신호위반과 속도위반 등으로 과태료가 쌓였을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과태료가 30만원 이상 누적된 차량의 번호판을 압류할 수 있다. 시사저널은 최근 번호판이 영치된 포르쉐 카레라의 등록원부를 떼봤다. 자동차세는 1건 체납됐지만, 미납 과태료는 7건이 쌓여 있었다. 건강보험료는 2년 동안 730만원이 밀렸다. 할부금도 다 갚지 못해 저당 잡힌 상태였다. 결국 이 차는 3000km밖에 안 뛰었는데도 영치 차량으로 전락했다. 

서울시는 통상 자동차세 체납이 5건이면 견인 조치에 들어간다. 2년 반 동안 미납해 왔다는 얘기다. 주성호 서울시 38세금징수과 조사관은 “견인 현장에서 차주와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차주가 사정해 번호판만 영치하고 돌려보냈는데 찾으러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세금을 끝까지 내지 않은 셈이다. 

이럴 때는 다시 견인하기 위해 차량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주소지를 옮겨 행방불명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견인한 이후에도 차주가 장기간 세금 납부를 미루면 차량을 공매에 부치게 된다. 지난해 6월 경기 시흥시는 체납 차량인 벤틀리 컨티넨탈 GT를 공매장에 올렸다. 이 차량 소유주는 지방소득세 5000만원을 포함해 여러 세금을 체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영치 차량이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세금 누수가 따라온다. 서울에서 번호판 미회수로 걷지 못한 자동차세는 최근 2년간 31억원(개인 차량 기준)에 이르렀다. 해당 기간 동안 25개 자치구 중 체납액이 가장 많은 곳은 서초구였다. 서초구 38세금징수팀 관계자는 “차주의 부동산을 압류해 세금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재산이 없어 끝내 못 걷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카푸어가 지방 재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번호판 찾는 대신 체납 택한 카푸어

영치 차량의 소유주는 차를 팔 수 없다. 폐차도 불가능하다. 세금을 내지 않는 이상 본인이 갖고 있어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몰래 폐차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폐차보상금(고철대금)이라도 챙기기 위해서다. 즉 서류상엔 체납액이 남아 있는데 압류 대상은 없는 상황이 돼 버린다. 

수입차도 폐차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경기도의 한 폐차업체 관계자는 “폐차하는 10대 중 수입차는 2대 정도”라며 “수입차 폐차 비율이 늘고 있다”고 했다. 

때로 영치 차량은 범죄에 얽히기도 한다. 지난 2월 울산지법 형사부는 가짜 번호판을 달고 차량을 운전한 40대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피의자는 자동차세 체납으로 번호판이 영치되자, 종이에 차 번호를 인쇄한 뒤 철판에 붙이고 다닌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공기호(公記號) 위조죄에 해당한다. 번호판 바꿔치기도 당연히 불법이다. 지난 2018년 유명 작곡가인 유영진 SM엔터테인먼트 이사가 오토바이 번호판을 바꿔 달고 다니다가 기소된 바 있다. 

최근에는 카푸어의 등장 배경이 좁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젊은 층의 자동차 구매가 감소하고 있어서다. 자동차 데이터 분석업체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20~30대의 신차 구매대수는 2018년 상반기보다 16.4% 줄어들었다. 올해 들어 1월에는 2만3600대, 2월엔 1만6900대로 또 감소했다. 불황이 이어지는 데다 차량 공유 문화가 확산된 게 원인으로 풀이된다. 

단 중고차 시장에선 20~30대의 입지가 다르다. 직영 중고차 거래업체 케이카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중고차 구매자 중 20~30대 비중은 절반에 가까운 45.2%였다. 2018년 상반기(44.1%)보다 1.1%포인트 증가했다. 중고차업계 관계자는 “유예할부로 비싼 차를 타거나 전세차(아파트 전세처럼 차값의 100%를 보증금으로 내고 차를 빌리는 것)를 모는 등 여전히 별의별 카푸어가 존재한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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