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투쟁하는 낭만 전사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2 11:00
  • 호수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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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저널리스트 이채훈의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MBC PD 출신 가운데는 특이한 계보가 있다. 진행자 못지않은 말발을 자랑했던 주철환 아주대 교수나 김민식 PD 등이 대표적이다. 마니아로 손꼽히는 사람도 많은데, 스피커 마니아인 박성제 사장도 있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클래식 마니아인 이채훈 PD다. 그는 최근 은퇴한 정길화 PD를 비롯해 최진용 PD, 양승동 PD 등과 함께 언론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투사 계열에 있지만 정작 자신은 가장 예민한 클래식 음악 마니아였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이채훈 지음│혜다 펴냄│356쪽│1만6000원 ⓒ조창완 제공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이채훈 지음│혜다 펴냄│356쪽│1만6000원 ⓒ조창완 제공

6권의 클래식 관련 저작 출간한 마니아

이미 6권의 클래식에 관한 저작이 있는 그가 최근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를 출간했다. 공덕시장의 낡은 식당에서 그를 만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7악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 대해 친구인 작가 공지영은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의 글이 다르게 읽힌다. 글에서 음성이 들리고 모습이 보이게 되니까. 만남이란 그렇게 엄청난 것이다. 내가 ‘슬픈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친구 이채훈은 그렇게 우리에게 클래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음악에서 육체가 느껴지고 감각이 생생해져서 그만 음악 듣기가 어떤 사건으로 변해 버린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어떤 계기로 클래식에 빠졌을까.

“클래식에 빠진 것은 누나 때문이다. 내가 중 1 때, 누나는 21살이었다. 경기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독문학을 전공하던 누나는 방을 독일어 원전 책으로 사방을 채울 만큼 다양한 사색을 했는데, 한국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그해 4월 너무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1년 뒤쯤 누나가 모은 LP판에서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물을 통해 클래식 전반을 소개한다. 그 모차르트와 베토벤만 한 악장씩 배치하고 다른 인물들은 시대별로 묶어 넣었다. 실제 음악사에서도 두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지만, 자신에게도 두 인물이 주는 기억이 워낙 커서 그랬다.

“누나의 슬픈 감수성을 이어받았지만 나는 누나가 남긴 베토벤에게서 ‘고뇌를 넘어 환희로’ 이어지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특히 누나의 죽음은 12살 꼬마의 마음에 베토벤에 대한 치명적 사랑을 일깨워줬다.”

클래식 이야기는 얼핏 독자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틈을 주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팁들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책 중간에 관련 음악을 들을 수 있는 QR코드를 심어놓아 이동전화로 스캔만 하면 유튜브에 있는 관련 영상과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물론 이 영상들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의 연주도 있지만, 현대의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하는 흥미로운 연주들이 상당수라 또 다른 흥미를 끌게 해 준다.

“책을 읽으면서 곧바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내가 지난 40년 넘게 즐겨왔던 음악의 진수를 아주 쉽게 느낄 수 있다. 북한의 애국가와 미국 국가 ‘성조기’를 같이 연주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을 곧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독자들도 느껴봤으면 한다.”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다른 장치는 각 장의 마지막에 있는 ‘소년, 클래식을 만나다’라는 부분이다. 액자소설처럼 읽히는 이 부분은 그가 12살 때 이화여대 강당에서 있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그곳에 갔다가 우연히 볼 뻔한 이야기를 비롯해 자신을 클래식으로 이끈 누나의 슬픔 삶, 음악가를 꿈꾸던 이야기 등이 있어 하나의 액자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음악이 아닌 철학을 전공했다.

“전공일 뿐 난 개똥철학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이 철학자다’라고 한 안토니오 그람시나 화이트헤드 정도는 좋아했지만 교조적 방향으로 가는 기성 철학은 흥미가 없었다. 대학교 때는 이강숙 선생의 강의를 듣고 관심을 가진 메시앙을 듣기 위해 음대 자료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다.”

시간이 지나고 취업철이 오자 그는 막연히 생각하던 방송국에 입사했다. 1984년 말이다. 스스로는 80년대 방송통폐합으로 인해 자리가 나서 얻어진 기회였다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클래식 전문 PD를 생각했지만, 해외 취재가 많다는 말에 결국 다큐멘터리 PD가 됐다.

“클래식 프로를 할 수 있는 시기는 1995년이었다. 광복 50년 특집 프로그램인 ‘21세기 음악의 주역,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의 연출을 맡으면서다. 섭외비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잘 끝났고, 이후 모차르트 250주년 특집, 빈 필하모닉, 쇼팽 200주년 특집 들을 맡으면서 ‘귀호강’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투사적 기질을 버릴 수는 없었다. 2012년 사장 퇴진을 요구하면서 벌인 파업에 동참했고, ‘미디어오늘’에 클래식 칼럼을 쓰면서 음악에 빗대어 부도덕한 MBC 경영진을 비판했다. 이 칼럼들은 2012년 작가가 해고되는 빌미가 됐다.

 

소설처럼 들려주는 클래식 이야기

“풍찬노숙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지인들이 내밀어준 도움의 손길과 음악이었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권유로 ‘진실의 힘 음악여행-마음에서 마음으로’를 2년간 진행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 조작으로 간첩이 된 어르신들의 기억과 클래식을 매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누구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책의 마지막에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게’를 소개한 것도 그런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후반에는 ‘상처받은 용’ 윤이상을 소개했다. 그는 독재정부와 타협하지 않았던 윤이상의 외침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음악은 특권자들을 위한 성찬 식탁 위의 금잔에 담긴 향내 나는 미주(美酒)의 역할만 할 수는 없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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