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란 속 100년 전 임정의 ‘을과 을’ 연대가 주는 교훈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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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50회(최종회) - 임시정부의 손님과 ‘을과 을’의 연대

코로나19 공포로 전 세계가 멈춰 섰다. 세계적 대유행을 일컫는 팬데믹을 넘어 전시 상황에 비유될 정도다. 바이러스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전염병의 발원지로 알려진 우한(武漢)은 100여 년 전 ‘제국(帝國)’ 아닌 ‘민국(民國)’이란 혁명 바이러스를 중국 대륙에 퍼트린 진원지이기도 하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우창봉기’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까닭이다. 우한은 또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 신규식(1879~1922) 등이 우창봉기에 참여해 혁명 주역들과 교분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하이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했다.

“한·중 애국지사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자”는 의미를 지닌 이 단체에는 중국의 혁명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주족인 청나라 통치에 대항한 한족 정치세력과 ‘을(乙)과 을’의 연대를 이뤘던 것이다. 신아동제사는 이후 신한청년단의 모체가 되어 상하이 임시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 1921년 광둥 호법정부가 우리 임시정부를 최초로 인정한 것도 혁명파 인사들과 친분을 다져 온 결과였다. 이렇다 보니 임시정부는 일찍부터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해마다 3·1절 경축식을 성대하게 열면서 중국·인도·필리핀·대만·베트남 등 피압박 민족 운동가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중국 우한의 신해혁명 기념관과 독립운동가 신규식. 오른쪽은 만국기가 내걸린 1921년 임정의 3·1운동 기념식 장면
중국 우한의 신해혁명 기념관과 독립운동가 신규식. 오른쪽은 만국기가 내걸린 1921년 임정의 3·1운동 기념식 장면

‘을과 을’ 국제 연대, 아시아와 유럽 식민지인들과 펼친 임정의 反식민 항쟁

2018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임시정부가 베트남 독립운동가 호찌민(1890~1969)을 지원한 내용이 담긴 희귀 자료가 발견됐다. 베트남의 식민종주국 프랑스 경찰이 그의 파리 활동을 밀착 감시한 사찰 보고서였다. 이 문건에는 “임정 파리위원부가 호찌민에게 통신국 사용을 지원했고, 중국 신문과 잡지에 그의 글이 실리도록 주선했다”고 적혀 있다.

보고서는 또한 ‘극동의 평화’를 주제로 한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한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호찌민을 대동한 정황도 담고 있다. 황기환은《미스터 선샤인》이란 드라마에 나온 유진 초이의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다. 재미교포인 그는 세계대전 중 미군에 입대해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전후 파리에 도착한 신한청년단 대표단에 합류했다. 이 대표단이 현지에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전환됐기 때문에 호찌민은 사실상 임정의 ‘첫 손님’인 셈이었다.

흥미로운 건 호찌민이 김규식·조소앙·황기환 등 임정 요인들을 ‘항쟁의 롤모델’로 여긴 점이다. 사찰 보고서에 적힌 “그는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아 이들의 활동 방식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는 대목이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한다. 그 후 중국에서도 호찌민과 임정 요인들의 교류가 이어졌다는 증언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여러 가명을 사용한 데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사실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어찌됐든 우리 임시정부가 파리에서 베트남의 해방운동을 지원한 일은 신규식의 신아동제사에 이어 또 하나의 ‘을과 을’ 네트워크를 구축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황기환과 2015년 뉴욕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그의 묘. 파리 체류 시절의 호찌민
황기환과 2015년 뉴욕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그의 묘. 파리 체류 시절의 호찌민

오스트리아 지배에 놓인 체코의 라돌라 가이다(1892~1948) 장군도 임정의 반가운 손님이었다. 1920년 임정은 귀국길에 상하이를 방문한 그에게 독립운동을 지원한 감사의 표시로 은제 컵을 선물했다. 체코군 이야기는 좀 복잡하다. 1차 세계대전 때 식민종주국인 오스트리아군에 편입된 체코 군인들은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과 맞섰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독자 부대를 만들어 전사에 유례없는 ‘전장 이탈’을 감행했다. 완전무장한 6만여 대군이 열차를 탈취해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기를 처분해 귀국 비용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무기 정보를 입수한 임정과 독립군은 이들과 접촉해 신형 소총 1200여 정과 탄약 80만 발, 박격포, 기관총 등 상당량의 무기를 넘겨받았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이범석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우둥불》에서 “이 무기는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밝혔다. 그 무렵 체코 가이다 장군은 임정의 여운형 일행을 환대하며 “나를 한국 민족의 우인(友人)으로 생각해 달라. 귀국 후에도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 귀로의 여운형에게 군용 열차를 제공하고 자신의 부관을 경호원으로 딸려 보내기도 했다. ‘우연히’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온 체코 군인들이 왜 이런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게 된 걸까.

그 궁금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필자가 오래전 프라하에 있는 가이다 장군 묘와 체코군단 기념관을 방문한 기억과 만나게 된다. 당시 안내인은 군인들이 횡단 열차 안에서 발행한 신문 자료를 뒤져 한국 관련 기사들을 건네주었다. 3·1운동 소식이었다. 열차로 이동하며 신문을 찍어낸 것도 그렇거니와 남의 나라 식민지 해방 운동을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게재한 일은 더욱 놀라웠다. 약소국 망명 군인들이 같은 처지의 조선인들에게 동변상련의 심정을 느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에다 임정의 ‘을과 을’ 연대 노력이 더해져 무기 제공이 이뤄졌고, 이어 청산리 승전이란 뜻밖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 나라 역사의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체코 군단 기념관과 가이다 장군. 오른쪽은 당시 체코군 병사들과 무기
체코 군단 기념관과 가이다 장군. 오른쪽은 당시 체코군 병사들과 무기

체코 못지않게 영국령 아일랜드도 오랜 식민통치에 시달렸다. 이곳 출신인 조지 루이스 쇼(1880~1943)는 중국 단동에서 자신이 경영하는 이륭양행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두고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등 우리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다가 1920년 내란죄로 일경에 체포되어 4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1월 상하이 임시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맞아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열었다. 힘들고 쪼들리는 형편에도 손님 대접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지 쇼, 가이다, 호찌민 세 사람 모두 억압받는 식민지 출신으로 우리 임정의 ‘반식민 연대’ 투쟁에 힘을 보탰다. 서로 가진 것이 부족하다 보니 조금의 도움도 상대에게 큰 힘으로 여겨졌을 터이다. 체코군 입장에서는 무기 제공이 단순히 귀국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거래이거나 러시아 붉은 군대에게 무기를 뺏기지 않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청산리 대첩의 승리를 안겨준 은인으로 비춰진다. 거꾸로 보자면 임정 파리위원부가 호찌민을 도운 일도 그들의 항쟁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베트남 근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란 이유에서 더욱 그러하다.

 

100년 전 임정의 ‘을과 을’ 연대 노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 같은 사례는 수두룩하다. 필자는 그동안 ‘역사의 데자뷰’ 연재를 통해 우리와 다른 나라 식민 역사를 비교한 사례를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해 왔다. 이 작업은 같은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들과 “역사적 동질성을 회복하고 이를 토대로 국제적 평화 연대를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이웃 일본과 중국은 역사 외교를 적극 펼치고 있다.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상대국 국민들에게 ‘동지(同志) 의식’을 심어주고 나아가 끈끈한 ‘역사 동맹’을 구축하려는 뜻으로 읽힌다. 우리가 임시정부의 ‘을과 을’ 연대 노력에 주목하고 보다 ‘깊이 있는’ 역사 외교를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아무리 전염병 대란이라지만 무려 180여 개국이 한국민에게 서둘러 문을 닫아 버린 ‘외교 성적표’는 참담한 지경이다. 한류 열풍이니 경제 강국이니 떠들썩했지만 정작 위기에 몰린 우리에게 ‘우군’이 있긴 한 건지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강대국 일변도의 외교를 고집해 온 후과(後果)를 치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국발 입국을 금지한 해외 각국들의 결정으로 3월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발 입국을 금지한 해외 각국들의 결정으로 3월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00년 전 임정의 우군은 강대한 ‘갑’의 나라가 아닌 힘없는 ‘을’이었다. 이들과 다진 반식민 연대는 적잖은 성과를 이뤄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도 현실이 달라졌겠는가. 4월11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아 같은 약소국 손님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펼친 우리 망명객들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짚게 된다.

※ “우리나라와 해외 각국의 식민역사를 비교해 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교훈을 찾고자 했던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가 50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던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필자 이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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