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19금·일상 장르물·쿨한 멜로…드라마의 뉴노멀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18 12:00
  • 호수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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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방송 환경, 변화하는 성공 드라마의 기준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6회 만에 18%(닐슨코리아) 시청률을 넘겼다. 이례적인 것은 이 드라마가 19금이라는 사실이다. 수위 높은 베드신과 불륜에 맞불륜이라는 과감한 설정, 게다가 남편 내연녀의 부모에게 “당신 딸이 내 남편과 바람피워서 임신했다”고 폭로하는 대목은 그토록 많은 불륜과 파경을 다뤘던 KBS 《사랑과 전쟁》에서도 보지 못했던 파격이다. 19금 드라마는 시청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통념을 《부부의 세계》는 어떻게 보기 좋게 깨버린 걸까.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JTBC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JTBC

결과론이지만 《부부의 세계》는 오히려 19금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완전하게 보이지만 순식간에 파경에 이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부의 세계’라는 것을 불륜이라는 코드를 집어넣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19금이어서 지금껏 우리 드라마가 가지 않았던 길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6회 만에 주인공 지선우(김희애)는 결국 남편 이태오(박해준)를 폭발시켜 이혼도 아들도 쟁취하게 되지만 드라마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걸 예고했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이야기 전개가 가능했던 것은 이혼이 이 드라마의 끝이 아니고 그 후에도 할 이야기가 더 많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부의 세계’가 이혼을 한다고 해서 끝나는 세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혼은 했어도 관계(핏줄, 이웃, 동료, 친구 등등)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OTT(동영상 제공 서비스)를 통해 해외 드라마를 익숙하게 접하면서 19금 드라마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시청자들의 취향 또한 《부부의 세계》 성공에 영향을 미쳤다. 해외 드라마는 더 자극적인 설정들이 등장하면서도 완성도도 높다. 시청률을 좌우하는 중장년층을 위한 콘텐츠라는 점도 주효했다. 중요한 건 이런 파격 속에서도 막장이 아닌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부부의 세계》는 그 부분마저 만족시켰다. 19금은 안 되고, 불륜은 막장이라는 통상적인 기준들을 이 드라마는 깨버렸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시청률 고공행진 하는 드라마들의 차별성

tvN 목요스페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5회 만에 11.3% 시청률을 기록했다. 신원호 PD의 전작이었던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기록했던 최고 시청률 11.1%를 간단히 넘겨버렸다. 그런데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여타 의학 드라마가 가진 공식들과는 사뭇 다른 결을 보여준다. 물론 의학 드라마라 갖가지 사연을 가진 환자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들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중심에 서 있는 이야기는 이른바 의대 5인방으로 불리는 의사들의 개인사와 일상이다.

이 드라마가 확실히 다르다는 건 첫 회에 율제병원 회장의 부고로 그 아들인 안정원(유연석)과 재단 이사장인 주종수(김갑수) 사이에 회장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이 등장할 것처럼 가다가, 갑자기 선선히 그 자리를 내주는 안정원의 선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런 권력의 위치에 서는 자리가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래서 주종수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면서 VIP 병동의 운영을 자신이 맡겠다 선언한다. 부자들을 통해 버는 돈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쓰겠다는 심산이다.

의학 드라마는 보통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의사들의 팽팽한 긴장감을 떠올리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런 극적 상황보다는 우리 주변 병원에서 벌어질 것 같은 일상적인 자잘한 사건을 가져와 거기서 ‘슬기로운 선택’을 하는 의사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의학 드라마라는 장르물의 성격을 띠고는 있지만, 우리가 장르물에서(특히 의학 드라마에서) 주로 봐왔던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간다. 가족 드라마이면서 휴먼 드라마 같고 또 멜로 드라마 같기도 한 그런 길을. 하지만 그렇게 어깨에 힘을 쭉 빼놓고 자잘한 일상적 사건 속을 들여다보자 인물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인물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드라마는 굉장한 사건 없이도 시청자들을 몰입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프렌즈》 같은 시트콤을 지향해 시즌제 드라마를 하고 싶다는 이우정 작가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이 드라마가 바로 거기에 딱 어울린다는 걸 알 수 있다. 인물들이 살아 있으니 자잘한 에피소드들만 엮어도 시즌 몇 개는 뚝딱 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드라마다.

SBS 드라마 《하이에나》 ⓒSBS
SBS 드라마 《하이에나》 ⓒSBS

종영한 SBS 드라마 《하이에나》는 최고 시청률 14.6%를 기록했다. 법정 드라마지만 《하이에나》가 독특했던 건 법정물이라는 장르와 멜로를 이렇게 쿨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 ‘하이브리드’했다는 점이다. 우리 법정물은 대부분 정의를 메시지로 세우면서 이를 구현해 내는 영웅적 인물들을 그려내곤 했다. 《하이에나》 역시 이런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마치 게임 같은 경쾌함을 톤 앤 매너로 담아낸다.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변호사들은 자신의 부정한 의뢰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직업적 숙명을 떠안고 있지만 그걸 그리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건 성취하기 위해 때론 개인적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일을 하기도 해야 하는 ‘직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변호사들이 어느 날 자신들도 어떤 목적을 위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사냥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변호사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그것은 ‘뼈까지 씹어 먹어 똥이 하얗다’는 정금자(김혜수)가 걸어가는 하이에나의 방식을 따르는 일이다.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면서도 나름의 소신을 지키는 그런 방식.

지금껏 장르물과 멜로가 섞이는 하이브리드 장르가 많았지만 《하이에나》는 장르에서도 또 멜로에서도 너무나 쿨한 선택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쿨한 선택들은 여러모로 해외 드라마들의 영향이 크다. 좀 더 끈끈한 멜로와 장르를 보여주던 우리 드라마들이 적당한 감정적 거리를 둔 채 일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고, 이것이 지금의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OTT를 통해 해외 드라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우리 드라마도 글로벌한 인기를 얻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됐다. 그래서일까. 성공하는 드라마들의 뉴노멀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시청자들 취향이 급변하고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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