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층’은 살아 있다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28 08:00
  • 호수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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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당 참패, 중도층 완전히 등 돌린 혹독한 심판의 결과

“중도층을 끌어낼 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4·15 선거일 개표방송 때 박형준 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이 말했던 패인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을 가져온 이번 총선의 승패 역시 중도층의 선택에 달렸음을 말해 주는 광경이다. 지난 20대 총선 때와는 달리 중도를 외치는 목소리는 잦아든 선거였지만, 중도층은 그렇게 조용히 선거의 승부를 좌우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사실 21대 총선에서 중도 정치세력은 몰락했다. 중도정당을 표방했던 국민의당은 3석뿐인 소수정당 신세가 되었고, 엇비슷하게 중도개혁정당을 표방했던 민생당은 아예 당선자를 내지 못해 원외정당이 되고 말았다. 4년 전 총선 때 국민의당이 38석의 약진을 거두며 기염을 토했던 중도의 깃발은 초라한 모습으로 내려졌다. 이제 우리 정치에서 중도는 생명을 다한 것일까.

황교안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4월15일 전 당 대표직 사퇴를 밝힌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황교안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이 4월15일 전 당 대표직 사퇴를 밝힌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민주-통합 득표율 8.4%p차…중도, 승패 좌우

지난 선거 과정을 돌아보면 중도 표심을 얻기 위한 정당들의 경쟁은 변함없이 치열했다. 21대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층 비율은 선거전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해도 30%가량으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그랬기에 중도층 지지를 얻으려는 민주당과 통합당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지난해 조국 사태를 거치며 중도층 민심의 이반을 경험했던 민주당은 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선거에 임했다. 정권 관련 검찰 수사와 여권발 검찰 압박의 대치 상황이 부각되는 것도 민주당에는 부담이었다. 선거전 초반 임미리 교수 고발 파문이 일어나고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총선에 미칠 영향에 대한 민주당의 긴장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방주사를 미리 맞은 민주당의 경험은 본격 선거전에서는 중도층의 정서에 어긋나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며 다가가는 전화위복의 역할을 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에 따른 국난 극복 메시지는 중도층으로 하여금 이럴 때 정부와 여당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는 정서를 만드는 데 주효했다.

당초 정권심판론을 내걸었던 통합당도 통합과 공천 과정에서 중도층을 의식한 노선을 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정작 본게임에 들어가서는 막말 퍼레이드와 코로나 방역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비상식적인 정당의 모습을 보여 합리성과 상식을 우선하는 중도층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 전쟁》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진보세력이 선거에서 실패하는 이유를 프레임의 부재와 실패에서 찾고, 도덕성과 진정성을 무기로 프레임을 재정비하라고 조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진보진영 후보자는 중도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흔히 약간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성을 잃는 것이며, 유권자들이 모를 리 없다.” 레이코프의 지적은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보수진영에 해당하는 말이 돼 버렸다. 중도층은 보수정당이 내놓은 선거용 전시품들에 넘어가지 않고 그들의 근본을 보고 등을 돌린 것이다. 진정성 없는 프레임 전쟁에서 패한 것이 통합당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번 총선에서 통합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민주당을 선택한 중도층 유권자들은 각자가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몰상식한 행태를 보였던 보수야당에 중도층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을 보여준 셈이다. 앞으로도 중도층의 존재는 참패한 보수야당은 물론이고 180석 여당에도 긴장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여당을 지지했지만, 그들이 오만과 무능력을 보여 실망을 안겨줄 경우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중도층이기 때문이다.

손학규 전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왼쪽)·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시사저널 박은숙ㆍ임준선
손학규 전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왼쪽)·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시사저널 박은숙ㆍ임준선

중도 표방 정당들 철저히 외면당해

21대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의 정당별 득표율은 민주당 49.9%, 통합당 41.5%였다. 180 대 103이라는 의석수 차이에 비하면 막상 득표율 차이가 그렇게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소선거구제가 낳은 착시효과라 할 수 있다. 만약 선거전 중반 이후 중도-부동층이 대거 민주당 지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승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통합당의 잇따른 자멸 행태에 등을 돌리고 여당을 지지한 중도 성향 부동층의 태도 변화에 따라서는 언제든 다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뀔 수도 있는 정도의 격차다. 그러니 중도층은 여론과 선거를 좌우하는 힘을 변함없이 갖는다.

이번 총선에서 역설적인 광경은 중도를 표방했던 정당들이 정작 중도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결과다. 여야의 두 거대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부동층으로 남아 있던 유권자들이 정작 중도정당들을 대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민의당이나 민생당에는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중도를 표방했던 정당들의 몰락은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거대 기득권에 맞서 싸우겠다던 그들의 약속은 자신들의 ‘작은 기득권’을 둘러싼 파쟁으로 변질되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끊임없이 쪼개지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분열의 모습만 보였다. 그들은 결코 중도층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도정당을 표방한 정당이 몰락했다고 중도층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흔히 중도층을 가리켜 정치에 무관심한 층이라고 한다. 일관된 판단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층이라고 비하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우리 정치에서 중도층의 역할은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 중도층은 특정 정당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이들은 자신을 어느 한편으로 고정시켜 놓지 않고 그때그때 선택을 달리하는 까다로운 층이기에 정당들로서는 이들을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선거든 집토끼의 지지만으로는 이길 수 없고, 산토끼의 지지까지 얻어야 이길 수 있다. 그런 중도층이 있기에 정당들은 긴장하며 경쟁을 벌이게 된다. 통합당의 총선 참패는 중도층을 완전히 등 돌리게 만든 정당이 얼마나 혹독하게 심판받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여당은 180석을 차지한 반면 보수야당은 자기 앞길조차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통합당의 모습을 보면 상당 기간 의미 있는 견제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고 ‘우리 민주당 하고 싶은 것 다 해!’라며 승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는 것이 민주주의를 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실질적인 견제를 할 수 있는 것이 중도층이다. 진영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며 합리적 판단을 하려는 중도층에게는 영원한 지지도 영원한 반대도 없다. 참패한 보수야당에 가장 무서웠던 것이 중도층의 심판이었듯이, 압승한 여당이 잘못하면 또한 떠날 수 있는 것이 중도층이다. 중도층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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