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통해 어설픈 책임감에서 벗어나라”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26 11:00
  • 호수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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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생존 키워드 전하는 전영수 교수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각자 살길을 스스로 도모한다는 의미다. 사자성어인데 정작 본고장 중국에는 없는 단어임에도 한국 사회에선 자주 차용된다. 주로 환란이 닥칠 때 단골로 소환되는 단어였는데 1998년 외환위기,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가장 많이 쓰인 용어였다. 2019년 직장인이 가장 많이 선택한 그해의 사자성어 1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사회의 실존형 생존 키워드로 각자도생이 등장한 것이다. 싫든 좋든, 살아나자면 누군가를 의존하기보다는 자립할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를 뒷받침한다.”

사회경제학자인 전영수 한양대 교수가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길어진 저성장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생존 키워드를 설명한 《각자도생 사회》를 펴냈다. 전 교수는 그간 이기적인 삶의 방식으로만 여겼던 각자도생적 철학에 긍정의 시선을 보내며 이에 맞는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 인구통계와 세대 분석으로 사회 변화를 읽어낸 《한국이 소멸한다》 《은퇴대국의 빈곤보고서》 등으로 한국 사회의 위기를 예리하게 진단해 온 그는 ‘열심히 살아도 가난해져만 가는 저성장·고위험 한국 사회에서 복지 파탄과 사회 비용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자구책이 바로 각자도생이라고 설명한다.

《각자도생 사회》 전영수 지음│블랙피쉬 펴냄│232쪽│1만4800원 ⓒ블랙피쉬 출판사 제공
《각자도생 사회》 전영수 지음│블랙피쉬 펴냄│232쪽│1만4800원 ⓒ블랙피쉬 출판사 제공

사회 변화에 따른 합리적인 결과로 자리 잡아

“각자도생은 괜히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줄어든 안전지역은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가령 직장 공간은 위험 천지다. 어제의 동료가 떠밀리듯 물러나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듯 힘들게 취업에 성공했지만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사회도 그렇다. 배려나 양보는 사라졌다. 기성세대의 생존 원칙은 악다구니로 정리된다. 더 빨리, 더 많이 챙기려 운동장을 기울인다. 불안이 촉발시킨 그들만의 생존법이나, 결국엔 모두에게 자충수인 셈이다.”

‘코로나19’까지 덮쳐 올해 잠재성장률을 마이너스로까지 점치는 한국 사회, 미래 소득을 당겨와 쓰기는커녕 취업절벽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루하루가 불안한 일상 속에서 이제 각자도생은 사회 변화에 따른 합리적인 결과로 자리했다. 본인만 살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전 교수는 타인을 향한 어설픈 책임감 대신 자기 몫의 행복한 삶으로 공동체를 지켜내자고 이야기하며, 개인의 삶이 ‘우리’라는 어설픈 굴레에 갇혀 있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그 현실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

“혼자도 힘든 판에 결혼과 출산은 어림없다. 기존 가족도 저성장 앞에서 가족 기능의 재구성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맞벌이로의 안착은 아빠다움·엄마다움이 아닌 개별 멤버의 평등한 질서를 요구한다. 전통 역할이 붕괴되니 가족 구성원은 각자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식을 찾아 나선다. 성 역할은 물론 연령에 대한 고정관념도 각자도생 앞에선 무너진다. ‘남녀노소’에 부여된 과거의 기준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가령 청년은 연애를, 중년은 희생을, 노년은 은퇴를 거부한다.”

전 교수는 기성세대의 모든 틀을 깨부수는 청년부터, 양육 졸업을 선언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중년, 자녀에게 짐이 되는 건 사양하는 뼛속부터 다른 노년까지, 각자도생으로 새로운 사회를 그려내는 신세대의 흐름을 읽어낸다.

“예전엔 극소수에 불과했던 ‘나 홀로’ 중년 남녀가 급속히 늘어났다. 30대의 만혼(晩婚)이 40대에 들어서 비혼(非婚)으로 확대된 결과다.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나, 갈수록 장벽이 높아져 중년 싱글로 남게 된 경우다. 특별한 이유로 생애 독신을 결심한 게 아니라 사회적 상황이 결혼을 지체시킨 셈이다. 주류까진 아니어도 중년 싱글은 이제 언제 어디서든 쉽게 목격된다.”

 

개인의 행복한 삶으로 공동체를 지키는 생존법

전 교수는 이제 시대에 발맞춰 효용을 잃은 제도는 폐기하고,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할 새로운 제도를 다시 마련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주장한다.

“4인형 가족 모델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로 강조되고 확대된 것이었다. 아빠는 회사에 가고 엄마는 살림하며 자녀 둘을 둔 전형적인 핵가족을 정상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저성장의 먹구름이 넘어오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정상 가족은 이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통의 가족 역할은 폐기 대상에 올랐다. ‘아빠다움’으로 실현해 낸 가족경제학의 시한이 종료되며 정상 가족의 폐기를 가속화했다.”

전 교수는 이런 흐름에서 등장한 셰어하우스나 따로 살되 함께 노는 근거(近居) 등의 확장적 가족 구성은 물론, 소비시장을 주도하는 중년 싱글, 새로운 자아 찾기에 나선 팔십 청춘까지 각자의 몫으로 충만하게 살아내려는 현대인들의 여러 실험을 소개한다.

“공간을 공유하는 셰어하우스는 현대 청년의 딜레마를 해소해 준다. 어려운 가족과 생소한 타인의 타협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통한 가족의 기능을 아예 포기하기보단, 타인의 가족화로 적절한 쓸모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언제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가 자유롭고 쉽기 때문에 특히 가족을 대신할 대안 가족으로 안성맞춤이다. 1인화가 거대한 시대의 흐름으로 안착했다는 점에서 셰어하우스의 전망은 밝다. 2019년 1인 가구는 599만 가구로, 잠재된 수요도 넘쳐난다.”

셰어하우스는 2013년 17곳에서 2018년 상반기 1020곳으로 불어났다. 한 지붕 혈연 가족이라는 전통 모델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반면, 한 지붕 타인 가족이 각자도생의 대안으로 흡수된 것이다. 이렇듯 전 교수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메시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바로 ‘각자도생’이라는 시대 트렌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제대로 직시해야만 위기에 대응할 새로운 해결책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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