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아닌 외국어로 창작하는 이유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교수 《외국어 전파담》 저자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5.10 13:00
  • 호수 159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지프 콘래드·사뮈엘 베케트·이회성…해방감, 표현의 자유에 유연성까지 획득

언어학자에게 언어는 과학적 연구 대상이다. 언어를 분석할 때는 당연히 자료나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얻은 결과가 말해 주는 데이터를 근거로 삼는다. 자칫하면 감정이나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고,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논의가 언어학자만의 역할은 아니다. 그 가운데 특히 19세기 이후부터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 바라보는 문인들의 활동은 매우 흥미롭다. 그 가운데 어릴 때 습득한 모어 외에 다른 언어로 창작하는 이들의 경우는 특히 더 흥미롭다.

아일랜드 출신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와 러시아 출신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1940~1996)는 모어가 아닌 언어로 창작해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더블린에서 태어나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프랑스 문학, 이탈리아 문학, 영문학을 전공한 사뮈엘 베케트는 졸업 후 파리로 떠나 유명한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1882~1941)와 친구가 되었고, 수많은 외국인 문인과 교류를 나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파리를 떠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1953) 역시 프랑스어로 쓴 뒤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왜 모어를 두고 프랑스어를 사용했을까. 습관처럼 굳어진 형식을 따르지 않고, 내면의 세계와 자유롭게 소통하면서도 진지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어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파리에 머무르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제임스 조이스의 그늘 밑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찾아낸 방법이 프랑스어였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걸 보면 그 선택은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외국어로 글을 쓰면서 누린 해방감과 차별성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니 말이다.

사뮈엘 베케트(왼쪽)와 조지프 브로드스키 ⓒWikimedia Commons 제공·연합뉴스
사뮈엘 베케트(왼쪽)와 조지프 브로드스키 ⓒWikimedia Commons 제공·연합뉴스

사뮈엘 베케트와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아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러시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15세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교를 거부했다. 문학을 좋아했던 그는 혼자서 폴란드어와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으로 1950년대 후반 잡지에 시를 게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63년 소련 당국은 브로드스키의 작품에 ‘반혁명적 정서’가 있다며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 탄압은 1972년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고국을 떠난 그는 창작활동을 이어가면서 미시간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시를 가르쳤고, 이 무렵 그가 선택한 언어는 영어였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브로드스키는 왜 영어로 시를 써야 했을까. 그에게 영어는 선택이 아니었다. 베케트와 달리 브로드스키는 매우 어렵고 힘든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그에게 영어 외에 다른 선택지가 주어질 리 없었다. 베케트가 해방을 위해 프랑스어를 채택했다면 브로드스키는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영어를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소련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러시아어로 시를 쓰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영어로 쓴 그의 작품의 감성이 깊은 것은 러시아어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언어 선택과 관련해서라면 일본 문학에도 흥미로운 인물이 몇 있다. 유명한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는 1946년 한 문예지에 이런 주장을 실었다. 요약하자면 일본어로 창작을 해 온 40여 년 동안의 답답함을 토로하며 이럴 바에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일본 국어로 삼는 게 좋겠다고, 일본인 감수성과 잘 통하는 프랑스어야말로 가장 잘 어울린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었을 뿐 정작 그는 프랑스어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이 주장은 잠깐 화제가 되긴 했지만,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저 패전국 일본이 가지고 있던, 메이지 유신 시절부터의 열등감의 표출이었을 뿐이다.

시가 나오야와는 반대로, 베케트와 브로드스키처럼 외국어인 일본어로 창작을 했던 작가가 있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난 양일(楊逸·1964년생)은 23세에 일본어를 전혀 모른 채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일본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2007년에 등단해 2008년에는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한다. 일본어를 모어로 쓰지 않는 작가로서는 최초였다. 외국인으로서 일본에 정착해 산 것은 베케트나 브로드스키와 비슷하지만, 그가 일본어를 배운 것은 문학 작품이 아니라 어학원과 대학의 교육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 때문에 그가 일본어로 창작한 것은 해방이나 표현의 자유로움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를 배우는 행위의 연장이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그의 일본어가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독자가 많다. 브로드스키의 영어가 그랬듯이.

시가 나오야(왼쪽)와 조지프 콘래드 ⓒWikimedia Commons 제공
시가 나오야(왼쪽)와 조지프 콘래드 ⓒWikimedia Commons 제공

외국어로 작품을 쓰는 가장 유명한 작가는 조지프 콘래드

같은 일본에 살면서 또 다른 이유로 일본어로 작품을 쓰는 이들도 있다.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金石範·1925년생)과 이회성(李恢成·1935년생)은 한국어를 잘 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쓴다.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이들에게 모어인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편하다는 것은 언어를 통한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아픈 상징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영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던 브로드스키에게 영어는 표현의 자유와 범위의 확장을 안겨줬지만, 이 두 사람에게 일본어는 정신적 구속을 안겼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일본 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높은 명성을 획득했다.

모어가 아닌 외국어로 작품을 쓰는 가장 유명한 작가라면 폴란드 출신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1857~1924)를 빼놓을 수 없다. 폴란드어가 모어였던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어를 배웠고, 훗날 영어를 배웠다. 세 개 언어 중 많이 쓴 건 영어였다. 다른 어떤 언어보다 유연해 쓰기 편하다고 여겼다. 프랑스어 실력이 훨씬 뛰어났지만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오히려 영어를 즐겨 썼다. 이에 비해 폴란드어는 좋아하긴 했지만, 잘 쓸 자신이 없어 오히려 읽기만 했다. 물론 영어권 시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영어로 써야만 책이 더 잘 팔린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작가들이 외국어로 작품을 쓰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해방감, 표현의 자유, 아름다움, 이국적인 느낌, 아픔 그리고 유연성까지. 논리와 과학적 연구 결과로 언어를 바라보는 언어학자와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언어학자에게 이런 태도는 취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문인들이라면 가능하다. 외국어를 배우려는 수많은 학습자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은 언어학자의 시선이 아닌 문인들의 태도 쪽에 서 있다. 

※ <언어의 역사>는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