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의 기념비적 문제작 《더 킹》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09 10:00
  • 호수 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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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 등장…시대 변화 거스른 로맨스 구도도 비판

SBS 《더 킹: 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는 김은숙 작가의 신작이자 이민호와 김고은의 출연작으로 관심을 모았다. 김은숙 작가는 최근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 등 3연속 대박으로 불패신화를 이어왔다. 그 전에도 《상속자들》 《신사의 품격》 《시크릿 가든》 《파리의 연인》 등을 히트시켜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원톱 작가’로 평가받아 왔다.

《상속자들》의 주인공으로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이민호였다. 이민호와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가 한한령이 떨어지기 전 중화권에서 가장 뜨거운 2인이었다. 김고은은 《도깨비》의 여주인공으로 한류스타 반열에 올랐다. 김은숙 작가와 이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고 하자 국제적으로 이슈가 됐다.

하지만 의외로 반응이 좋지 않다. 김은숙 작가의 작품들은 첫 회 이후 으레 시청률이 우상향으로 올랐다. 그런데 이번 《더 킹》은 첫 회에 11%대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시작했다가 3회 이후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6회에 반등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기대에 못 미친다. 심지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까지 이어지고 있다.

SBS 《더 킹: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SBS
SBS 《더 킹: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SBS

로맨스 드라마의 민낯 적나라하게 보여줘

이 작품은 김은숙 작가의 기념비적인(?) 문제작이라 할 만하다. 드라마사(史)에 기록되면서 앞으로도 두고두고 언급될 가능성이 크다. 로맨스 드라마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흔히 로맨스 드라마를 두고 ‘백마 탄 왕자님’과 ‘씩씩한 캔디’의 이야기라고 비유한다. 잘사는 남자 주인공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지만 당찬 여주인공과 로맨스를 엮어가는 스토리가 많다. 남자 주인공의 원형은 재력이 출중한 부자였는데, 재력이 능력으로 치환되면서 여주인공을 지켜주는 강한 남자상으로 바뀌기도 했다(《태양의 후예》 《미스터 션샤인》).

여주인공은 아예 독자적으로 기거할 거처가 없는 경우까지 있었다. 《시크릿 가든》에서 하지원은 옥탑방에서 친구와 함께 살았고, 《상속자들》에서 박신혜는 이민호의 집에 얹혀살았다. 《도깨비》에서 김고은도 같은 신세였다. 이 드라마들에서 남자 주인공은 모두 재벌이었다(《도깨비》의 공유는 재벌 그룹을 차명 소유). 그럴 정도로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를 수직적으로 배치해 왔다.

최근작인 《태양의 후예》와 《미스터 션샤인》에선 변화가 있었다. 《태양의 후예》에서 송혜교는 자기 스스로 중산층 정도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의사였다. 물리적인 강압에 굴하지 않고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을 추구할 정도의 강단도 있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태리는 부잣집 규수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저격수였다. 이 둘 모두 남자 주인공이 도와줘야만 자기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의존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에선 한계가 있지만, 어쨌든 기존의 로맨스 드라마 여주인공의 수동성에선 벗어났다. 이 작품들에서 남자 주인공의 재력은 일반 직장인 수준이었다. 김은숙 작가가 시대 변화와 호흡한다는 평이 나왔다.

ⓒSBS

그런데 《더 킹》에선 아니다. 마치 김은숙 작가가 시대 변화에 정면으로 맞선 형국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나는 로맨스 드라마의 관습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선언이 들리는 듯하다. 《더 킹》에선 남자 주인공이 진짜로 백마를 탄다. 게다가 직업이 황제다. 비유적으로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정말로 대놓고 백마 탄 왕인 것이다. 600경원이라는 가치(!)의 희토류 광산을 소유해 재산도 천문학적이다. 갖가지 스포츠와 격투에도 능할 정도로 신체가 이상적인데 심지어 수학자로서 이지적이기까지 하다. 전투 지휘도 직접 할 정도로 늠름하다. 여주인공이 숙소로 못 돌아가 발을 동동 구르자 헬리콥터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여주인공을 구해 준다.

이래서 기념비적인 문제작이다. 이 시대에 희귀한 정통(?) 로맨스물 구도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막아섰다. ‘백마 탄 왕’ ‘헬기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왕’이라는 키워드로 로맨스물의 정수를 정직하게 보여준 이상적 사례다. 교과서에 소개되고 각종 비평에서도 끊임없이 언급될 것이다. 거기에 여성 캐릭터 묘사 문제까지 겹쳤다. 대한제국 총리로 등장하는 여성이 화려하고 섹시한 외모로 황제를 유혹하는 데만 관심을 쏟는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논란이 커졌고 비판이 쏟아진다.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다.

ⓒSBS

불꽃이 튀지 않는 로맨스

작정하고 비판을 부르는 구도이긴 한데 새삼스럽진 않다. 로맨스물이 원래 이랬다. 《더 킹》이 좀 더 정직하게 민낯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런 본질을 알고도 시청자들은 김은숙 작가의 로맨스물을 지지했었다. 다만 지금은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 일부 여성 시청자도 《더 킹》의 정직함을 불편해한다. 게다가 초반 극 내용에서 로맨스의 불꽃이 튀지 않은 점도 시청률 저하의 주요 원인이다.

까칠한 남주인공이 어찌 된 일인지 여주인공에게만 직진남이 된다는 설정은 언제나 시청자의 설렘을 조장해 왔고 《더 킹》에서도 그 구도가 반복됐다. 그런데 초반에 설렘이 생기지 않았다. 《상속자들》에서 이민호가 “나 너 좋아하냐?”라고 직진했을 땐 설렘지수가 폭발했었는데, 《더 킹》에선 이민호가 갑자기 “내 황후로 맞이하겠다”거나 키스를 할 때 시청자들이 ‘미?(뭐임?)’하며 뜨악해했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납득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러니 남녀 주인공이 붙어도 로맨스 불꽃이 튀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느껴졌다. 초반에 전체적으로 극 분위기가 너무 어둡기도 했다. 시청자가 김은숙 로맨스물에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과형 남주인공과 문과형 여주인공이라는 회심의 설정을 내세웠지만 이조차 공감을 사지 못했다.

그래서 평가절하됐는데 아직 결론을 내리긴 이르다. 초반에 김은숙 작가에 대한 기대치에 못 미쳤을 뿐이지 작품 자체가 그렇게 ‘노잼’은 아니다. 초기 상황 설정 단계를 지나 로맨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딱딱하게만 그려지는 이민호의 연기에 조금 더 생동감이 생긴다면 더욱 몰입도가 높아질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은 항일의병을 다뤘다. 일본 한류 시장 눈치를 보는 풍토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김은숙 작가는 《더 킹》에서도 일본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대한제국을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일본군과 대치한 6회에 다시 두 자릿수로 시청률이 오르기도 했다. 분단되지 않은 대한제국의 넓은 철도망과 강한 국력을 그려 통일 한반도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시대착오적인 로맨스 구도만으로 무조건 폄하될 작품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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