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05.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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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ㅣ산티데바 지음ㅣ하도겸 편저ㅣ시간여행 펴냄ㅣ256쪽ㅣ1만 4000원

나는 50대 후반이다. 30대 초반부터 주말이면 등산을 즐겼다. 지리산 종주도 했고 눈 덮인 태백산, 설악산, 한라산에도 올랐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힌 산악회도 여러 개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등산의 취향이 변했다. 등산객들로 붐비는 명산을 찾아 온갖 장비를 갖추고 새벽 길을 나서지 않는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동네 산으로 걸어간다.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님에도 굳이 산정(山頂)에 발자국을 찍으려 하지 않는다.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는 것보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숲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앉을 만한 곳이 보이면 주저 앉아 멍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다. 반나절이 넘는 산행에 그저 숲에 앉아있기가 절반을 넘는다. 사람들과 대오를 이뤄 저 높은 고지에 오르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탐하는 대신 홀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동네 산이 심신의 건강에 크게 불리하지 않다. 그런 확신이 생겼다.

10여 년 전 어느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 흰머리에 구레나룻 덥수룩한 초로의 저자가 통기타를 치며 음유시인처럼 노래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 즉시 기타를 샀다. 나도 10년 후에는 그런 모습이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타를 익히며 노래를 부를 마음은 동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랬다. 오늘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생각했던 게으름이 아니었다. 나의 정신이 동(動)이 아닌 정(靜)을 원했던 탓이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그 시간에 나는 종이를 펴 먼산의 풍경을 침묵의 수채화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시간이 나면 종이를 펴 가까운 혹은 먼 곳에 자리한 사물들의 생각을 연필로 그리려 할 것이다.

일부러 그리 되려 한 것은 아닌데 50대 후반의 나이가 그리 되게 한 것 같다. 조용히 혼자 생각에 빠지는 것이 좋다가도, 그 따위 생각은 일체 버리고 무념무상 갈지자로 걷는 것이 또 좋다. 그러다 목향 품은 바람 한 줄기 만나면 단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깊은 숨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뿜으며 번잡하고 삿된 삶의 찌꺼기들도 함께 날려보내는 것이다. 기도가 따로 있고 명상수행이 따로 있다 하는데,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하는데 정신은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해 나는 여전히 잡념으로 괴롭고 걷다가 길을 잃어 망측하다.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팔대지옥(八大地獄) 고통스런 윤회 속에 어렵게 한 번 얻은 인간의 몸,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돌아가 깨달음을 만나기가 어렵다. 내 이웃을 고통에서 구하려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것을 원하는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가져야 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 보리행(菩提行)에 들어야 한다. 불타정각(佛陀正覺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1500년 전 인도에서 불타정각에 이른 산티데바가 불렀던 깨달음의 노래 “입보리행론”에 그 첫걸음이 들어있다.

불자(佛子) 교수 하도겸의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이 대중들에게 쉽게 읽히도록 현대판으로 재창작하는 공을 들인 책이다. 단순 번역을 넘는 ‘친절과 정성’이 넘쳐 번역이 아닌 편저(編著)다. ‘하도 겸손해서’ 이름도 하도겸인가! 열반에 든 부처보다 무지한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이 더 반갑다. 종교가 다르다고 이 책을 무작정 금서 목록에 올리면 하수 중 하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삶으로 통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전에 없이 힘든 나날에 마음의 평화를 얻어볼 모처럼의 기회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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