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 및 온라인이 성범죄 소굴 되고 있다”
  • 클레어 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20 08:00
  • 호수 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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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헬싱키대 사리 나레 교수 “페미니즘은 남성의 삶의 질도 높인다”

최근 밝혀진 ‘n번방’ 성착취 사건은 범죄의 잔인성과 함께 26만 명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사용자 규모로 전례 없는 공분을 사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오랫동안 경고해 왔던 전문가들은 “실존하는 여성의 성착취를 조직적으로 산업화한 역사는 20년이 넘었다”는 뼈아픈 지적을 하고 있다. 이런 성폭력 문제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엔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전 세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 부족 및 피해자에 대한 낙인화로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으로 12분마다 여성 한 명이 사망하고, 15~44세의 여성은 암·교통사고·전쟁으로 사망할 확률보다 강간과 가정폭력으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치를 내놓고 있다.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최소 74명의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3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로 이송되고 있다. ⓒ시사저널 고성준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최소 74명의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3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로 이송되고 있다. ⓒ시사저널 고성준

유럽 또한 2014년 이래 EU이사회 산하 ‘이스탄불 컨벤션’이라는 인권조약을 통해 여성 보호정책을 펼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을 목표로 하는 협약이다. 2011년 이래 45개국이 가입한 이 협약은 그레비오(GREVIO)라고 불리는 전문가 단체를 통해 비준국의 법규와 정책을 모니터링해 오고 있다. 유엔의 모든 국가가 가입한 ‘아동 성착취 및 성학대로부터 아동 보호에 관한 란사로테 협약’도 2010년 발효되었다.

이런 자구책이 나와도 유럽에서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근절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앰네스티 핀란드 지부는 5월12일 현재 “동의 여부로 강간을 정의하는 유럽 국가들은 스웨덴·독일·영국·스페인 등 총 10개국에 불과하다”고 시사저널의 문의에 답했다. 이스탄불 협약 기준을 적용하며 아직 진행 중인 그레비오의 조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몬테네그로·스웨덴 3개국만 적절한 법제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1906년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국가, 1907년 세계 최초로 19명의 여성 의원을 배출했던 여성 인권의 모범국으로 일컬어지는 핀란드는 어떤 상황일까.

시사저널은 핀란드의 저명한 여성 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사리 나레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올해 61세인 그는 현재 헬싱키대학에서 사회학 강의를 하고 있다. 10대의 문화 및 젠더 폭력의 형태에 관해 연구했으며, 2001~08년 녹색당 대표로 헬싱키시에서 성평등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젠더와 폭력, 여성주의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저술한 공로로 1992년 엘리아스 뢴로트 재단 문학상과 2008년 YWCA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헬싱키대 사리 나레 교수 ⓒ클레어함
헬싱키대 사리 나레 교수 ⓒ클레어함

Q. 핀란드는 성평등 지수 세계 2위 및 육아하는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 2위를 차지했다.

“우선 핀란드의 정부 기관은 신뢰할 만하다. ‘국가는 여성의 최고의 친구’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사회정책에 있어 우선순위가 아동의 권리이다 보니 여성들에게도 안정성을 주게 된다.”

Q.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을 포함해 다수의 여성이 정계에 진출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성과의 배경은 무엇이고, 여성운동은 어떤 과정을 밟아 왔는지 궁금하다.

“물론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성의 역할로 여겨졌던 일들을 여성이 맡게 되었고, 전후에도 여성들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야 했다. 1970년대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면, 1980년대는 자신만의 잠재력을 찾고자 했다. ‘여성의 자의식을 인식하는 그룹들’이 다수 조직되는 등 여성성을 긍정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는 (인종·계급 등) 여성 내부의 차이와 교차성에 관한 개념이 점차 생겨났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며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늘어났다. 핀란드에는 이미 1986년부터 성평등법에 의거해 중앙정부 및 시 단위 위원회와 이사회 등 주요직의 4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쿼터제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가정폭력도 상대적으로 높다.”

Q. 핀란드에서의 미투 운동 상황은 어땠나.

“미투 운동은 핀란드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구세대 가운데 연극 연출가 유코 투르카나 영화감독 라우리 퇴회넨처럼 주로 문화예술계에서 고발이 있었다. 이 영향으로 젊은 세대의 남성이 앞선 세대의 나쁜 행동을 모방하기 더 어렵게 되었다.”

Q. 페미니즘 운동은 종종 남성들의 저항과 백래시(변화에 대한 반발)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현명한 공교육이나 정책을 안다면 소개해 달라.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자아실현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는 것을 꼭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더 가진다면 이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감도 증진시키기 마련이다. 육아를 통한 부성애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해하는 젊은 핀란드 남성들도 자주 마주치곤 한다. 물론 국가와 사회는 이 과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지도록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 핀란드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부 및 부와 모 양쪽의 고용자가 부모수당을 부담하고 있다.”

Q. 성매매와 관련한 노르딕 모델(북유럽 국가의 성매매 정책)은 흥미롭다. 성매매 자체는 합법이지만 수요자인 남성만 처벌하고, 영업으로 하는 성매매 알선은 범죄로 처벌된다. 핀란드도 이에 해당하는지.

“그렇다. 성매매 알선을 처벌하는 것은 성착취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면 된다.”

Q. 2017년 처음으로 스웨덴의 한 남성이 ‘온라인 강간’으로 10년형에 처해졌다. 직접적 성교행위 없이도 강간죄가 성립하는 스웨덴에서도 인터넷상의 성폭력이 강간으로 처벌받은 첫 사례였다. 핀란드도 비슷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착취는 성폭력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안다.”

Q. 성평등은 성폭력 범죄를 줄이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평등한 인간관계는 상호 간의 존중감을 높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Q. 핀란드는 성평등 지수 면에서는 앞서 나가지만, 성폭력 근절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고 들었다. 이스탄불 협약 보고서는 핀란드의 성폭력에 대한 처벌 양형이 다른 가입국에 비해 아주 낮은 점, 성폭력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과 검사의 교육 부족을 지적했고, 여성 경찰을 늘려야 할 필요성도 언급했다. 특히 폭력의 사용 여부가 아닌 동의 부족 여부에 의해 강간을 규정하는 법 개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핀란드가 성폭력 대응에 뒤처진 건 사실이다. 한 예로 배우자 강간도 1994년에야 비로소 불법화되었다. 아마 핀란드의 강한 여성상이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여성은 강하고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는 믿음이랄까. 물론 성폭력의 경우 이것은 틀린 접근이고 여성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연대해 시스템을 바꿔 나가야 한다. 핀란드 여성들은 그간 성폭력에 관한 다수의 연구를 해 왔고, 실무팀을 조직해 의회나 정부에 정책을 제시하는 등의 캠페인을 펼쳐 왔다. 최근 소셜미디어 및 온라인은 성범죄의 소굴이 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범죄에는 새로운 방법의 해결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나는 여성의 정계 진출이 성폭력 예방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990년대 내가 헬싱키 시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처음으로 가정폭력에 대응한 캠페인을 전개했고 강간 피해자 지원센터도 헬싱키에 처음 문을 열었다. 2000년대에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폭력 위험성을 미리 인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에스푸시에서 ‘Own Space’라 불리는 예방모델을 개발하기도 했다.

산나 마린 총리 등 다수의 여성이 이끄는 현 정부는 성폭력 범죄에 관한 제도를 개혁하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이는 강간법 개정 및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확대, 아동 성착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란사로테 협약 준수 및 관련 기관과의 협력 증진 등이다. 특히 주요 도시의 대학병원에서 운영하는 피해자 지원센터가 포렌식 검사, 투약, 상황진단, 심리상담 등의 지원을 한 장소로 일원화하는 시스템은 피해자의 장기 지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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