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만 붙으면 지는’ 전남도
  • 호남취재본부 정성환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05.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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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인 ‘방사광가속기’ 탈락에 후폭풍
국책사업 유치 잇단 실패…왜, 누구 탓?
“정치적 뒷배만 믿고 준비 소홀” 비판

전남도는 지난주 큰 게임에서 패했다. ‘전남의 판교’로 기대되는 나주혁신도시에 과학기술부 공모사업인 ‘방사광가속기’ 선정을 위해 애가 닳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최종 탈락한 것이다. 전남도는 나름 선정을 낙관했던 만큼 충격에 빠졌다. 또한 타 시·도와 비교우위를 장담했던 터라 체면도 크게 구겼다. 특히 민선 6~7기 이후 대형 국책사업 유치전에서 ‘다른 지역과 경쟁만 붙으면 진다’는 전남도의 ‘경쟁력 부족’에 대한 관가 주변의 따가운 질책은 뼈아픈 대목이다. 지역 관가에서는 그 원인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지는 데’ 이골 난 전남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8일 오전 발표한 1조원짜리 방사광가속기 입지 선정에서는 전남을 비롯한 4개 도가 응모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이 게임의 승자는 충북 청주였다. 전남도는 나주혁신도시에 방사광가속기를 유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간 사업유치를 위해 노력해왔으나 허사였다. 충격이 컸던지 김영록 전남지사는 “입지 선정의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납득할 수 없으며 강한 유감을 표한다. 세부적인 평가 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발표가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재경 향우회와 도내 사회단체, 교수들을 비롯한 각계의 반발이 연일 이어지는 등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에선 “21대 국회의원 선거 때 몰표(전남 10석 중 전석)를 줬더니 민주당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정치권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대” 김영록 전남도지사 등이 7일 오전 나주시 빛가람전망대 입구에서 시·도민과 함께 손팻말을 들고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구축 부지선정평가위원회 나주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전남도
“기대” 김영록 전남도지사 등이 7일 오전 나주시 빛가람전망대 입구에서 시·도민과 함께 손팻말을 들고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구축 부지선정평가위원회 나주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전남도

하지만 이 같은 진통은 연이은 탈락과 패배의 역사를 상기해본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미 전남은 ‘지는 데’ 이골 난 지역이었다. 신안 흑산공항 건설과 여수 경도 복합리조트, 스마트시티 시범사업 등에 잇단 제동이 걸렸었다. 여수 경도지구는 지난 2016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의 복합리조트 개발 사업계획 공모에서 인천 영종도에 밀려 탈락했다. 당시 이낙연 전남지사를 비롯한 지역 정치권과 22개 시·군 단체장, 시민사회단체 등이 성명서와 청원서까지 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였다. 

 

‘농업 혁신사업’도 밀린 ‘농도(農道)전남’ 

심지어 경쟁 종목이 ‘농수산도(農水産道)전남’에 유리한 농수산업 분야에서도 졌다. 전남도는 농업 혁신사업’인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사업을 해남군 화원면의 솔라시도에 유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2018년 5월 T/F팀을 구성하는 등 사업유치를 위해 노력해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광주전남연구원, 전남농업기술원, 대학교수, 현장의 농업인, 시설원예 전문가 등이 수차례 자문회의를 열고 정부 평가에 대비했다. 또 김영록 전남지사와 당시 이개호 농림부장관 후보자라는 ‘뒷배경’ 때문에 선정을 자신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와 전북 김제에 패한 뒤 지난해 2차 공모에서는 선수를 교체한 끝에 고흥군에 간신히 유치했다. 지난해 1월에는 ‘스마트양식’ 유치에도 실패했다. 전남도는 신안군과 함께 전국 생산량의 50%를 생산하는 ‘새우’ 품종을 중심으로 사업계획서와 현장심사를 준비하는 심혈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평가위원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때마다 전남도는 “정부가 제시한 조건에 충족하고 평가과정에서도 지적이나 미흡 사항이 하나도 없이 만족스러운 분위기였는데 탈락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과 달리 전남도가 정치적 배경만 믿고 준비에 소홀했다는 경쟁 지자체의 지적도 만만치 않다. 타 지자체의 한 관계자는 “전남도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문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 지지와 전직 장관과 장관 후보자를 배출한 배경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꼬집었다.해남 스마트팜 혁신밸리 조성사업 유치 무산 당시 김기태 전남도의원은 “전남도는 전남을 지역구로 둔 이개호 국회의원이 농식품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것도 사업 선정에 우호적인 분위기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했다”며 “하지만 정치적인 배경만 믿고 준비에 소홀해서는 국책사업을 유치하기 힘들다”고 질책했다.

 

‘지는 전남’…정치의존·준비부실·자만 질타 목소리 

하지만 전남이 늘 경쟁에서 지는 책임을 ‘정치’에만 돌리기 어려운 정황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남도 공무원들의 능력과 성실성 또한 문제라는 것이다. 1986년 광주시가 전남도에서 분리돼 동급의 광역자치단체가 됐지만, 도청 공무원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광주시 공무원들을 한 등급 아래로 보았다. 언론도 광주시의 일처리가 미숙할 때마다 전남도와 비교하곤 했다. 그러나 광주와 전남 분리 이후 30여년이 지난 지금, ‘지는 전남’의 책임에서 전남도 공무원들이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비사업 심사를 자주 해본 한 지역대학의 교수는 “경쟁이 붙었을 때 전남도가 제출하는 자료를 보면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공모 경쟁에서 승패의 80%는 기획력과 창의력으로 결정된다”고 했다. 승패의 원인을 ‘정치’가 아니라 ‘실력’에서 찾아야 된다는 뜻이다. 

전남도 공무원의 ‘역량 부족’은 자체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전남도는 지난 2015년 공무원들이 폐쇄적이고 현실에 안주하는 조직문화 등으로 인해 역량이 미흡하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놨다. 전남도는 조직 역량 실태 보고서에서 “중앙부처에 올라가는 사업계획 보고서가 다른 지역의 보고서보다 내용이나 설득력이 부족해 중앙정부가 지원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게 중론”이라며 “공무원이 자기 업무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이 부족하고 글로벌 시대에 국제적 감각과 언어능력이 매우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 과방위 소속 김경진(광주북을) 의원도 최근 페이스북에서 올린 글에서 철저한 사전 준비없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전남도의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쓴 소리를 했다. 김 의원은 “전남도는 한전공대 확정이후 2019년에 갑자기 뛰어들었다. 정치의 힘을 활용하려고 한 징후도 엿보였다”며 “이번을 계기로 전남도 길게 지역발전을 준비하는 그랜드 마스터플랜을, 넉넉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습관이 생겼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리더십 시험대에 오른 ‘김영록’

“격앙”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8일 오후 도청 브리핑룸에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부지 선정에 따른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김 지사는 “입지 선정의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였다”며 “세부적인 평가 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전남도
“격앙”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8일 오후 도청 브리핑룸에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부지 선정에 따른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김 지사는 “입지 선정의 전 과정이 기울어진 운동장였다”며 “세부적인 평가 결과 공개와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전남도

전남도라는 조직 분위기도 문제라는 분석도 있다. 전남도는 ‘주사급 도지사’로 불릴 정도로 깐깐했던 이낙연 전 지사의 총리 부임 이후 두 번에 걸친 지사 대행이 바뀔 때마다 조직 이완은 물론 정책도 겉돌았다는 지적이다. 도청 안팎에선 “이낙연 지사의 총리 발탁 이후 한동안 일손을 놓고 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이어 민선 7기 지사직에 오른 김영록 지사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도정을 무난히 이끌고 있다. ‘선비형 소통 리더십’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남도 공무원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포용하고 소통하는 모습이 취임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 같은 리더십은 자칫 동전의 양면처럼 독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수년 동안 깐깐한 수장이 사라진 상황에서 도청 공무원들은 성실하게 실력을 쌓기보다 처신과 요령에 더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는 게 지역 정가의 평이다. 이런 조직에선 무사안일과 보신주의가 팽배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지는 전남’의 근본 원인은 다시 ‘도백의 문제’로 돌아간다. 조직을 죽이고 살리고, 일 잘하는 공무원을 만들고 못 만들고는 그 조직의 ‘장(長)’한테 달렸다는 것이다. 지역정가의 한 인사는 “엄밀히 보면 이번 국책사업 탈락은 김영록 지사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대신 김 지사는 이런 조직을 바꿔야 할 책무가 있다”면서 “잘못된 조직문화와 분위기를 바꾸는 건 조직의 수장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김 지사가 이런 일을 잘해낼지는 다음 국책사업 경쟁의 결과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민선 7기 취임 2주년을 앞둔 김 지사의 리더십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분위기다. 

전남도가 나주 방사광가속기 유치 실패와 흑산공항 건설 심의 보류 등의 암초에 부딪치면서 좀 더 적극적인 김영록 전남지사의 정치력과 조직을 진취적으로 견인하는 리더십 발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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