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대는 평양 권력… ‘포스트 김정은’ 논의 시작됐나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 승인 2020.05.28 14:00
  • 호수 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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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조용원, 김정은 원산 체류 때 보좌…김재룡 등 경제통 위상도 높아져

북한 권력 내부가 요동치고 있다. 외부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적지 않은 조직 개편과 인물 변화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조용한 용틀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사태로 북한이 대외관계와 남북 당국 대화를 단절시킨 뒤 내부 체제 정비에 돌입한 이후에 이뤄져 왔다. 지난해 10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백두산 백마 등정과 12월말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 그리고 올해 들어 잇달아 개최된 노동당의 주요 회의와 최고인민회의 등을 통해 결정되고 단행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북 정보 당국이 파악한 첩보를 토대로 살펴보면 권력과 인물 변동이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부가 5월13일 공개한 ‘2020 북한 인물 정보’ 자료집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노동당의 핵심 부서인 정치국의 교체 비율이 80%에 가깝다. 또 우리의 내각 격인 국무위원회 멤버 11명 가운데 9명이 교체됐다. 통일부가 해마다 발간하는 이 자료는 국가정보원 등 우리 정보기관이 수집한 북한 권력 변동을 종합 분석한 것이다. 통일부는 “김정은 친정 체제가 공고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 고위 간부들이 4월15일 김일성 주석의 108회 생일(태양절)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 고위 간부들이 4월15일 김일성 주석의 108회 생일(태양절)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노동당 정치국 인사 80% 교체돼

295명의 북한 파워엘리트를 담은 이 인명록에 이름을 올리면서 ‘뜬 별’로 등장한 인물로는 김영환 평양시 당위원장, 김조국 노동당 제1부부장, 리호림 당 부장, 장금철 당 통일전선부장, 허철만 당 부장(간부 담당으로 추정), 김정은의 의전을 담당하는 현송월 당 부부장 등이 꼽힌다. 북한의 공작활동을 담당하는 정찰총국장에 새로 임명된 림광일과 경호 책임자인 곽창식 호위사령관도 등재됐다.

앞서 지난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는 조직과 인사 면에서 세대교체와 김정은이 선호하는 인물의 발탁이란 특징을 보이며 변화를 나타냈다. 노동당 부위원장 12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물갈이되면서 대미 협상 등 외교라인을 책임져온 리수용 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교체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후임으로 러시아 대사 출신인 김형준이 임명되면서 향후 대미·대외 정책에서 새로운 북한의 전술이 드러날지에 관심이 쏠렸다.

북한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당 전원회의 인선 결과는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공개됐다. 김정은이 수장으로 있는 국무위원회에 하노이 노딜 사태의 책임이 있는 라인을 퇴진시키고 미사일을 비롯한 전술무기 개발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인물을 전면에 포진시켰다. 김형준 노동당 국제담당 부위원장, 신무기 체계 개발을 담당한 리병철 당 부위원장, 김정관 인민무력상, 김정호 인민보안상이 국무위원회에 합류했다. 반면에 리선권 외무상과 최부일 전 인민보안상, 노광철 전 인민무력상, 리수용 전 당 부위원장(외교 담당), 태종수 전 부위원장(군수 담당), 리용호 전 외무상 등은 국무위원에서 해임되는 상황을 맞았다.

물론 이런 직책 변동이나 노동당과 군부 주요 인물의 부침보다 중요한 건 실질적으로 권력을 가진 인사들의 움직임이다. 공식적인 직위나 타이틀이 아니라 김정은 체제의 북한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떠오르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한 건 여동생 김여정과 베테랑 노동당 관료 조용원이다. 당 제1부부장직을 맡은 두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최고 실세로서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난 건 4월 중순 불거진 김정은 건강 이상과 사망설 등을 통해서다. 4월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김정은 위원장은 김일성 생일인 같은 달 15일 할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를 빼먹으면서 유고설을 촉발시켰다. 국제사회의 시선이 김정은과 북한 권력에 쏠린 상황에서 참배행사에 참석한 당과 군부 핵심 가운데 김여정과 조용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됐다. 곧이어 이들 두 사람이 김정은의 원산 체류에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북 정보 당국에 포착되면서 ‘엄중한 시기 최고지도자 곁을 지키는 인물’로 관심을 끌었다.

유고설을 불식시키며 5월1일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을 공식 수행한 인물 6명 가운데서도 이들이 발견됐다. 박봉주 정치국 상무위원, 김덕훈·박태성 당 부위원장, 김재룡 내각 총리 등 행사 단상에 김정은 양옆으로 각각 3명씩 포진한 인사들 가운데 김여정·조용원 제1부부장은 단연 돋보였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에 따른 문책성 조치로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김여정은 활동 폭을 넓히고 있어 주목된다. 올 3월엔 담화 주체로 나서 청와대와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했고, 곧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친서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믿을 건 혈육뿐”이란 생각을 갖고 있을 오빠의 든든한 후광을 업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우리 정부 당국자의 판단이다. 지난해 10월 김정은과 함께 백두산을 말을 타고 등정함으로써 북한 세습 정권을 이어가는 이른바 ‘백두혈통’(김일성과 그 일가를 지칭)의 일원임을 과시했고, 올 4월 정치국 회의에서는 하노이 노딜 이후 내줬던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도 다시 거머쥐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노동절(5·1절)이었던 지난 5월1일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튿날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위원장이 노동절(5·1절)이었던 지난 5월1일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튿날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믿을 건 혈육뿐”…김여정 행보 주목

관심은 김여정이 김정은 위원장의 대안 카드로 자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2012년 출범한 김정은 체제에서 일찌감치 핵심 직책을 맡아 노동당의 사업을 챙겨온 김여정은 명실상부한 2인자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해도 권력투쟁이나 숙청 가능성 때문에 몸을 사리고 불안에 떨어야 하는 다른 고위 간부들과는 다른 입장이다. 하지만 유사시 김정은의 후계자로 북한 권력을 넘겨받아 수령의 지위를 이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일 수 있다. 권력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사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세습을 통해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은 생전에 3대 세습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내 대(代)에서까지 세습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생각에 입헌군주제 사례에 관심을 나타낸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여름 스트로크로 인한 심각한 건강 이상을 겪은 뒤 3개월 만에 겨우 복귀한 김정일은 당시 24세에 불과한 막내아들 김정은에 대한 후계수업을 본격화했다.

김정은 유고설 와중에 김여정은 권력 후계 1순위로 꼽히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건재를 과시했다고는 하지만 김정은의 건강 문제는 여전히 북한 체제의 내구성과 관련해 아킬레스건으로 간주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 위원장은 10세 안팎의 아들을 포함해 세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고 시 대안이나 후계권력 문제를 둘러싼 김정은의 고민이 깊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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