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선진국의 조건
  • 김재태 편집위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20.06.01 09:00
  • 호수 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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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국민소득이나 군사력을 봤을 때 강대국임이 분명하다. 태양계 밖까지 우주탐사선을 띄워 보내는 항공우주기술을 보유한 나라라는 사실은 부럽기까지 하다. 오랫동안 미국을 바라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나라가 자국민 보호에 쏟은 고강도의 의지와 열정이었다. 비록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사건 등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지만, 미국은 나라 밖 국민이 무고하게 고통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만은 결사적으로 막기 위해 노력해 왔다. 위험을 무릅쓴 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행동했다. 그것은 미국이 보여준 가장 선진국다운 면모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국민을 지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미국은 지금 전혀 딴판이다. 팬데믹으로 번진 코로나19 앞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5월28일 현재 10만 명을 넘은 자국민이 바이러스에 희생돼 아까운 목숨을 잃었는데도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감염병 위협에 잘 대처하고 있다는 자화자찬만 지도자의 입에서 공허하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실제 미국이 처한 현실의 엄중함은 1면 전체를 코로나19 사망자 1000명의 이름과 부고로 채운 지난 5월24일자 뉴욕타임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은들, 항공우주기술이 뛰어난들 그처럼 많은 국민이 잇따라 사망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나라를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글로벌 시대 지구촌의 정보는 결코 한곳에 갇혀 있지 않는다. 시간 차이가 있을지언정 세계 각국의 코로나19 대응 방식과 능력은 모두 언제든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선진국으로 인식돼 왔던 미국, 일본,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에 맥없이 뚫려 자국민 생명 보호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들이 과연 선진국인가’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K방역이 세계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코로나19 대응에서만큼은 이제 한국이 선진국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이미지는 한국처럼 감염병 대처를 잘한다고 해서,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또는 과학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법과 제도다. 누구 한 사람이, 또는 한 세력이 선의(善意)로라도 체제를 함부로 흔들 수 없을 만큼 법과 제도가 잘 갖춰져 있는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21대 초선 당선인들을 위한 설명회가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21대 초선 당선인들을 위한 설명회가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법은 한 나라를 지탱해 주는 근육과 같다. 그 근육이 부실할 경우 국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요령껏 빠져나갈 수 있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빈틈을 잘 막아놓아도 솜방망이 처벌 등 제재 규정에 구멍이 많다면 그 또한 법이 아니다.

그 법의 골격을 만들고 책임져야 하는 21대 국회가 이제 막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새로 구성된 국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각지대를 바로잡고 빈틈없이 허점을 찾아 보완해 선진적인 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새 국회가 반드시 완수해 내야 할 첫 번째 임무다. 코로나19 대응처럼 국민이나 정부만 잘한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법치주의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의회가 먼저 우등생이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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