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음모론’ 아니 땐 굴뚝 연기인가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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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386 참모들이 ‘굿모닝 게이트’ 수사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거론되면서 여권 내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들이 음모론의 배후로 지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건 배신이야!”. 최근 유인태 정무수석을 만난 민주당 정대철 대표는 이렇게 절규했다. 정권을 창출한 일등공신에서 졸지에 정치 생명마저 위협당하는 처지로 전락한 한 중견 정치인의 분노와 절박함이 배어 있다.

정대표가 굿모닝시티 수사와 관련해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믿게 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30년 가까운 정치 경험칙으로 보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그는 자기가 수사 대상이라는 사실을 7월9일 밤 9시 신상규 서울지검 3차장으로부터 출두 통보를 받고서야 알았다.

그간의 관행으로 보면 여당 대표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대표는 청와대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분개했다. 한 측근은 “청와대가 방어해 주지는 못할망정 사전에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핏대를 올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냉랭한 태도와 청와대 정무 라인의 미숙한 대응도 정대표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여러 차례 정대표의 SOS를 외면한 노대통령은 7월21일 여야 대선 자금 공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검찰이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고 미적거린다면 법무부장관에게 엄정 수사하라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본뜻은 검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듣는 정대표측은 격분했다. 386 핵심 측근인 안희정씨가 검찰 수사를 받을 때는 ‘동업자’라며 감싸고, 이기명 전 후원회장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노무현의 편지’까지 쓰며 적극 방어했던 것과 너무나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정대표 체포동의안에 주저 없이 사인한 것도 정대표를 자극했다.


그 와중에 정대표 귀에 들어온 각종 제보, 이를테면 청와대 386 참모들과 검찰 수사팀이 지연과 학연으로 얽혀 있다는 측근들의 잇단 보고는 정대표로 하여금 음모론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정대표측은 현재 청와대 핵심 386 ㄱ씨와 박범계 민정2 비서관, 검찰 고위 간부 ㄴ씨, 그리고 ‘굿모닝 게이트’ 수사 검사 ㄷ씨를 4인방으로 의심하고 있다. 박비서관과 ㄱ씨, ㄷ씨는 대학 동문이고, 박범계과 ㄴ씨는 고교 선후배 사이이며, 그래서 이들 라인을 중심으로 청와대와 검찰 간에 긴밀한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대표의 한 측근은 “ㄴ씨가 송광호 검찰총장에게 ‘정대표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는 청와대의 뜻’이라고 보고하자 송총장이 사실 여부를 청와대에 확인했는데, 문재인 수석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문수석도 왕따당하고 있다는 얘기 아니냐”라며 흥분했다. 정대표측은 현재 사람들을 풀어 음모론을 뒷받침할 만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청와대 386·검찰 커넥션’설은 민주당 ㄱ의원이 비공개 확대 간부회의에서 제기한 후 음모론의 근거로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때마침 공개된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의 ‘집권당 사무총장 희망’ 발언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386 음모론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정대철 제거-노무현 신당 창당-안희정 등 노무현 친위대의 당직 장악-내년 총선에서 세대 교체 완성’이라는 386 참모들의 그랜드 플랜이 한 자락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시나리오가 급속도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집권당 사무총장 희망론’은 음모론에 회의적이던 신주류 일부 의원까지도 386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신주류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386 들러리만 서다 팽당하는 것 아니냐’ ‘특등 공신(대표)이 저런 험한 꼴을 당할진대, 나머지야 바람 앞의 등불 아니냐’는 불안감이 부쩍 확산되는 분위기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들”이라며 격한 감정을 토해내는 의원도 있다. 노골적으로 386 참모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대표에 이어 조순형 의원도 “청와대 기강이 해이해져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고 있다. 대폭적인 인사 개편이 필요하고,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라고 거들었다.

민주당의 한 386 당직자는 전선이 묘하게도 신·구 주류 대결에서 세대간 대결로 이동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정치권 액세서리에 불과했던 386 세대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해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느껴지면서, 475 세대 이상이 급격하게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당직자는 그래서인지 신주류 의원들도 갑자기 상향식공천제와 진성당원제 같은 당 개혁안에 대해 주저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 386 초선 의원은 지난 6월19일 범개혁신당 추진 준비위원회가 내년 총선 출마 예정자 1백20명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부터 기류가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명단의 대부분을 386이 차지하면서 기성 정치권이 386 세대를 자기들을 대체할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런 386 음모론에 대해 청와대와 386 참모들은 한결같이 ‘음모는 없다’고 부인한다. 386 참모가 정대표를 칠 이유가 없고, 그럴 만한 힘도 없다는 것이다. 정대표의 말처럼 386과 중진들은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없으면 이가 시리듯 서로가 보완적이라는 의미)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화살을 정대표의 일부 측근과 언론 쪽으로 돌린다. 정대표의 후광을 입어 차기 총선에 도전하려던 정대표 측근 가운데 일부가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음모론을 흘리고 있고, 일부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해 신주류 내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 청와대 참모는 “청와대 386에 대해 브레이크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386 세대 전체를 흠집 내기 위해 가장 씹기 좋은 청와대 386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역음모론을 제기했다.

이들의 말마따나 386 음모론에는 다소 거품이 끼었을 수 있다. “음모는 자고로 ‘기획’을 전제로 하는데, 그동안 청와대 386은 오히려 ‘아마추어’라는 비판을 받아오지 않았느냐”라는 한 청와대 386의 항변에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기회에 386 참모들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방에서 울리는 경고음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386 스스로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386 참모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빌미를 제공하곤 했다. 이번 음모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박범계 비서관이 언론에 대고 ‘찌라시’ 어쩌고 하며 수사 내용을 언급한 점이나, 안희정 부소장이 신당과 총선 논의가 한창인 민감한 시점에 사무총장 어쩌고 하는 인터뷰를 한 점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책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주변과 좀더 대화의 통로를 열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386 참모들은 걸핏하면 음모론에 휘말렸다. 청와대 386 대 부산파 간의 알력, 청와대 수석과 386 비서진의 갈등, 그리고 이번에 불거진 386 음모론까지. 노대통령 경선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이런 끊임없는 불화설이 386 참모들의 지나친 배타성에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386의 대통령 독점욕이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386을 ‘분파주의자’라고 혹평한 그는 “유종필·윤석규·이충렬 등 후보 시절 대통령을 보좌했던 475가 다 배제된 데는 386 참모들의 견제가 작용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안에서조차 386 참모들에게 단절감을 느낀다는 사람이 많다. 정부에서 파견된 한 청와대 직원은 386 참모들의 ‘끼리끼리’ 의식이 도를 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한 직원은 386 참모의 문제점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에 쓰기가 꺼려진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이번 안희정 부소장의 인터뷰 파문을 다룬 보고서는 대부분 언론의 왜곡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지, 안부소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언급한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386 세력은 아직 주도 세력이 될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청와대 참모면 그림자처럼 참모 역할만 하고, 정치를 할 요량이면 현장에 내려가 밑바닥부터 기어야 한다”라는 부산 386 정윤재 위원장(부산 사상구)의 충고는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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