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현대 돈 받았을 것” 86.6%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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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관계없이 금품 수수 정치인 밝혀라” 82.1%…3김식 정치에 ‘유죄 선고’
사람들은 그를 한때 동교동계 맏형이라고 불렀다. ‘DJ가 시키면 비행기에서도 뛰어내릴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의 충성심, 공안 당국의 추적을 피해 연락처 수백 개와 경리 장부를 머리 속에만 입력하고 다닌 치밀함.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권노갑씨(전 민주당 고문)는 지난 40여 년간 DJ 불사(不死)의 신화를 지탱하는 참모장 역할을 했다.

그런 권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끝내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국민의정부 후반기부터 이미 그랬다. 2001년 민주당 내부에서 촉발된 정풍 파동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와 동교동계로 대표되는 이른바 가신 집단의 전횡이 DJ 정부를 멍들게 한 주범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하기 전 동교동계 해체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시사저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현대 비자금 파문은 권씨가 속한 동교동계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복구가 불가능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분석된다.

일단, 일반 국민의 절반 가량은 검찰의 이번 수사가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검찰의 권씨 수사를 두고 신당 창당을 위한 동교동계 구파 죽이기가 시작됐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공감한다(50.5%)는 응답자가 공감하지 않는다(42.3%)는 응답자보다 약간 많았다.

이처럼 정치적 배후를 의심하면서도, 응답자들은 권씨가 현대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검찰 주장에는 상당 부분 신뢰를 보냈다. 비자금을 받았다는 검찰과 받지 않았다는 권씨, 어느 쪽 주장이 사실일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권씨(6.9%)보다 검찰(86.6%) 손을 들어준 응답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아가 응답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고 보았다. 동교동측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이 현대 비자금 수수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무려 88.8%에 달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권씨가 구속됨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대상으로 응답자들이 여야 정치권 모두(38.0%)와 동교동계 및 김대중 전 대통령(35.1%)을 엇비슷하게 꼽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11.8%)과 386 등 민주당 신주류(6.0%)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소수였다.

이는 정치권이 체감하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결과치이다. “자칫하면 공멸입니다, 공멸.” 권씨가 긴급 체포된 다음날 민주당 내 한 신주류 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경우 이른바 권노갑 리스트를 폭로하겠다며 자해 전술로 나오는 구주류 앞에 신주류는 맥없이 밀리고 있다. 신당 창당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던 전당대회도 현재로서는 물 건너간 기색이다.

그러나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는 일반 국민이 정치권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곧 일반 국민은 386 등 신주류가 권씨로부터 돈을 받았건 말았건, 이번 수사가 신당과 관련이 있건 없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보다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자금 불법 수수 따위 낡은 관행을 뿌리 뽑고 정치 개혁·정당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다. 이는 공소 시효가 지났더라도 돈 받은 정치인은 끝까지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는 응답률(82.1%)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도 확인된다.

물론 권씨나 동교동계로서는 아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이같은 여론 재판을 당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동교동계만이 아닌 구(舊) 정치권의 숙명이다. 개인의 잘잘못에 앞서 정경 유착으로 얼룩진 3김식 정치 그 자체가 유죄라고 이번 여론조사는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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