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주의 정책, 미래 어둡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12.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인 ‘신자유주의’ 노선 수용…외국 자본 의 국내 산업 지배 길 터…‘국회 주변화·포고령 정치’도 문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좌파였느냐 우파였느냐를 둘러싸고 지난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에르하르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서독 우파인 기민련(CDU) 소속의 아데나워 정부에 경제 장관으로 참여해 나중에 총리까지 지내면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인물이다. 당시 그가 내건 경제 체제는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시장 원리를 존중하되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을 국가가 보호한다는 내용의 ‘사회적 시장 경제’였다.

그런 그를 놓고 인수위가 내홍을 겪게 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사회적 시장 경제를 표방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일부 인사가 에르하르트를 좌파인 사민당(SPD) 출신인 것으로 오해하면서 사회적 시장 경제가 좌파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인식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결국 인수위는 김대중 정부가 좌파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회적 시장 경제뿐만 아니라 그것과 동의어인 ‘민주적 시장 경제’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인수위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 체제로 사회적 시장 경제의 이론적 기반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학파가 발전시켜 온 ‘질서 자유주의(Ordo-Liberalism)’를 표방하기로 결정했다.

인수위 시절 이같은 경험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과연 무엇이냐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게 만든다. 이는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 체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IMF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치·사회·문화 부문도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 체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 체제를 규명하는 것은 정권 전체의 성격을 규명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실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김대중의 길’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족 국가가 탄생해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진 지금 헌법을 위배하지 않는 한 모든 정책은 대통령의 결단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국민은 김대통령이 제시하는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무작정 추종해 산에 오른 병사들에게 나폴레옹이 ‘이 산이 아닌가 봐’라고 말했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비극이 빚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대중의 길은 어떤 길인가. 이에 대해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와 제2 건국위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질서 자유주의라고 규정했다. 이 관계자는, 질서 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와 달리 ‘애초부터 소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소비자 주권 경제 체제’로서 △재벌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콜드 게임’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한 경쟁 질서를 구축하고 △시장에 대한 규제도 금리 인하와 같은 시장 친화적 수단을 통해 실시한다는 핵심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나 재경부가 공식적으로 질서 자유주의를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김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쓴 책 <대중경제론>에서 질서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거명하지 않았으되 프라이부르크 학파의 이론이 소비자 주권 경제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언급한 적은 있다. 또한 재경부가 지난 9월 정부의 경제 청사진을 담아 발간한 에서는 질서 자유주의가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 체제라는 점을 간접 시사한 바 있다.

재경부는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는 부제를 가진 에서 ‘정부가 기업들이 독과점을 유지하고 담합 조직과 각종 이익 단체를 결성해 정치 권력을 침해하는 것을 막고, 공정한 질서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체제가 질서 자유주의’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질서 자유주의 아래에서는 정부가 자의적인 재정 운영이나 과도한 복지 정책을 통해 자원 배분에 개입하면 오히려 시장 경제 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본다고 재경부는 지적했다.
부익부 빈익빈 심해지는 신자유주의

그러나 김대중의 길이 질서 자유주의라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김대통령이 미국과 월 가의 초민족적 금융 자본들이 확산시키고 있는 작은 정부와 시장 개방이라는 두 가지 테제를 핵심으로 삼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손호철 교수(서강대·정치학)가 지난 12월4일 한국정치학회가 주최한 한 학술회의에서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종속적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자유주의의 모태는 통화주의(monetarism)이다. 통화주의는, 경제가 자기 조절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만약 경제가 완전 고용 상태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동적인 조정 기능이 작동해 완전 고용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서 정부는 시장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시카고 대학 밀턴 프리드먼 교수를 비롯한 통화주의자들이 말하는 최소한의 정부 개입이란 정부가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지 않게끔 통화량을 조절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시장이 민주적 제도보다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할당하며, 국가는 비효율성의 원천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적 소유의 불균형 등으로 인한 빈곤 계층의 고통을 국가가 사회 보장 정책으로 치유해야 하는데도 신자유주의는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구조 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질 임금 감소와 같은 빈부 격차의 근본 원인이다.

신자유주의의 이같은 문제점은 국가들 간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미국은 개도국들이 시장 개방에 소극적이고 자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고수하자 이윤 축적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이 ‘시장은 완전하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시장 개방과 작은 정부만이 살길’이라며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대적으로 나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21세기 세계 지배를 위한 이윤 축적 전략의 수단으로 신자유주의를 택한 것이다.

지주회사 설립 허용=외국 자본 국내 기업 지배

그러나 정책기획위와 제2 건국위에 포진한 이데올로그들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앞서의 정책기획위 관계자는 12월7일 정·재계 합의를 통한 5대 재벌 개혁만 보아도 현정부가 지향하는 경제 체제는 질서 자유주의라고 반박했다. 다시 말해서 재벌들이 독과점을 통해 경제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중소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게 만들어 소비자 주권 경제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책기획위 관계자는 신자유주의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가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면 명백히 위헌이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 저명한 경제 평론가는 질서 자유주의냐 신자유주의냐 하는 논란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둘 다 정부가 경제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질서 자유주의는 정부가 공정한 경쟁 질서만 구축하면 된다는 입장인 만큼 이때 정부는 공정거래위로 대체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그는 김대통령의 측근 이데올로그들이 표방하는 질서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변종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앞서의 평론가는, 국제통화기금이 강요한 고금리와 긴축 재정 등 거시 경제 정책과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춘 뒤 이루어져야 할 시장 개방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것 자체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신자유주의임을 반증한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의 두 가지 핵심 교리인 작은 정부와 시장 개방 중 시장 개방이라는 교리만큼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고금리라는 거시 경제 정책을 수용한 것만큼 김대중 정부가 내거는 질서 자유주의와 배치하는 것도 드물다. 정책기획위 한 관계자가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는 경제 체제를 위한 질서 자유주의를 지향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김대중 정부의 고금리 정책은 중소 기업의 씨를 말려 버린 듯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97년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도산한 중소기업 수는 우량 기업을 포함해 무려 2만1천 4백82개에 달했다.

한 경제학자는 재벌 개혁도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신자유주의임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12월8일 국내 기업의 지주회사 (holding company) 설립을 허용한 것은 외국 자본의 효과적인 국내 진출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 이유로 국내 기업이 소수 지분으로 여러 기업을 거느리는 지주회사를 설립하면 외국 자본은 이 지주회사를 사거나 이 지주회사에 투자해 국내 기업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소영 교수(한신대·경제학)도 미국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따라 금융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출현하는 새로운 기업 지배 구조가 바로 지주회사라고 지적했다. 지주회사는 외국 자본으로 하여금 소수 지분으로도 합작 회사를 통제할 수 있게 해주고, 하청 회사를 통해 해당 국가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윤교수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지주회사는 월 가의 초민족적 금융 자본들이 개도국의 산업을 지배하게 해 주는 신자유주의적 첨단 무기인 것이다.

실제로 외국 자본들은 지난 3월 아시아·유럽 정상 회의(ASEM)에 참석한 김대통령에게 지주회사가 허용되지 않아 한국에 투자하기 어렵다고 불만을 제기한 뒤부터 압력을 행사해 왔다. 이는 세계은행(IBRD)이 1·2차 구조 조정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주회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올해 안에 국회에서 통과시켜 줄 것을 반복적으로 권고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지주회사 설립 허용은 재벌이 아닌 외국 자본들이 국내 산업을 지배하는 데 쓰는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지주회사 설립 허용과 함께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신자유주의적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정책으로 공기업 민영화가 꼽힌다. 정부가 공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포항제철·한국전력·한국통신 등 공기업을 민영화할 경우 이들 공기업은 국내 기업이 돈이 없기 때문에 외국 자본에 매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철강·전력·통신이라는 국가 기간 산업이 월 가의 초민족적 금융 자본들에 지배당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자 “야당 억압 필요”

그런데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이처럼 신자유주의로 규정해도 모순이 발생한다. 정부가 기업과 금융 구조 조정에 적극 개입하는 등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인 작은 정부가 관철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IMF 구조 조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셀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구조 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해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로 전환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윤소영 교수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보다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질서 자유주의에 기반해서 표방하는 ‘사회적 시장 경제’나 ‘민주적 시장 경제’ 모두가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의 변종이라는 것이다. 윤교수는 김대중 정부가 정부를 개혁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관철하는 데 관료 집단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는 정치 분야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국회의 주변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손호철 교수의 지적이다. 국회의 주변화를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의 결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프로그램에 대해 야당이 국회를 통해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의 책임을 맡은 해당국 정부에 ‘야당에 대한 분열과 억압 정책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전술인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합의를 주도한 존 윌리엄슨의 저서 <개혁의 정치 경제학>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이 책에서 윌리엄슨은 ‘위기의 시기에 정권을 잡아 구조 조정을 실시할 정부는 구조 조정에 유리한 대중과 짧게나마 밀월을 즐기게 되는데, 이때 야당이 분열되거나 야당을 억압하면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의 대의는 한층 강화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이는 김대중 정부가 그동안 취해 온 정치권 전략과 일치하는 느낌을 준다.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로 인한 또 다른 정치적 결과는 대통령의 ‘포고령 정치’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제2 건국위가 대통령령이라는 포고령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엿보인다. 한 정치학 교수는, 김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중앙 정부·지방 정부·토호 세력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조직인 제2 건국위를 창설한 이유는, 소수 세력으로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으로 인한 국민적 저항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대중의 길은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같은 시각은 정부가 미국의 압력으로 스크린 쿼터제까지 포기해 국내 영화산업의 존립 기반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현실로 인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지금까지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으로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받은 89개국 중 48개국이 그 전보다 경제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가 4년 뒤 한국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지 전망하게 해주는 단서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