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 키운 ‘싸늘한 요람’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잇단 살인 사건, 대부분 가정 결함에 원인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는 주인공 뫼르소가 등장하는 카뮈의 <이방인>은 현대 범죄의 복잡성을 예고한 소설이었을까? 원한이나 치정 따위 동기로 설명될 수 없는 ‘소설’ 같은 살인이 최근 한국에서도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5월21일 부모를 살해해 토막 낸 이은석씨, 3월에 홧김에 엘리베이터에서 여중생을 살해한 중학생 최 아무개군, 사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1년간 아홉 사람을 무참히 죽인 정두영씨, 자신을 폭행한 사람을 살해한 뒤 원한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살해한 천병선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언뜻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들 범죄에도 공통 분모가 있다. 모두 가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범죄 연구가들은 범행 동기를 분석할 때 중요한 열쇠인 가족·학교·친구·사회 가운데 가족을 가장 중시한다. 가족이야말로 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범인들의 가정은 대부분 해체된 상태였다. 정두영씨나 천병선씨는 전형적인 결손 가정 출신으로 고아원에서 자랐다. 중학생 최군과 이은석씨는 부모가 모두 있었지만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최군의 아버지는 취하기만 하면 최군과 어머니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이씨 가정도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했지만, 이씨가 어릴 적부터 부모가 각방을 쓸 정도로 부부 사이가 싸늘했다.

부모 사랑 못받아 인격 형성에 장애

또 두 사람 모두 아버지가 공부를 강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군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지만 아들 성적에는 무척 신경을 썼다. 최군의 성적이 떨어지자 학교를 이리저리 옮길 정도였다. 해병대 중령 출신인 이씨 아버지도 “너 같은 놈은 아무 것도 못한다. 공부라도 잘 해야 낙오하지 않는다”라고 말해 왔다. 이와는 다르게 천병선씨는 6·25 때 아버지가 군인에게 맞아 죽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었고, 결국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살해했다.

이들은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어머니와의 관계도 역시 정상적이지 못했다. 정두영씨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그 배신감 때문에 첫 살인을 했다. 이은석씨는 아버지의 폭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어야 할 어머니가 오히려 그를 차별하고 무시하자 부모 모두를 살해했다. 최군은 암 수술을 해 몸이 불편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어느날 아버지가 늘 하던 대로 어머니와 자신에게 폭언을 하자 집 밖으로 뛰쳐나가 여중생을 살해했다.

어머니에 대한 이씨와 최군의 태도는 대조적이다. 최군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순종적이었다. 이와 달리 이씨는 어머니를 무서워하고 증오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아들에게 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는 도시락도 싸주지 않았다. 이씨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동기도 성적이 나쁘면 학교에서 어머니를 부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씨가 어머니를 먼저 죽이고 4시간이 지난 뒤에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보면 이씨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1년 사이 아홉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한 정두영씨도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 사무쳤다는 점이 이씨와 흡사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없었고 무관심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에 의해 정씨는 형제들과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러다 일곱 살 때 재가한 어머니가 그를 데려갔다가 몇달후 다시 고아원에 돌려보냈다. 정씨에게는 충격적인 배신이었다.

완전 범죄를 위해 범행 도중에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을 가차없이 살해해온 그는 지난 3월 부산 서대신동에서 아이를 업고 있던 여자를 살려주었다. 이 여자의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가 만들어지고, 결국 정씨는 체포되었다. 정씨는 경찰에서 만약 어머니를 죽이면 아이가 자신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여자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무자비한 살인마였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연민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