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키드가 살인자 되기까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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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이은석이 즐겨 본 영화와 감상평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본 비디오가 수백 편, 소장하고 있는 테이프만도 수백 개, 영화 동호회 게시판에 올린 글이 수백 편. 과천 부모 살해 사건 용의자 이은석은 전형적인 영화광이었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그에게 영화는 세상과 만나는 창이었다. 그가 본 영화 중에서 특별히 의미를 부여했던 영화들을 살펴보고 그의 살인 동기를 밝혀줄 흔적을 찾아 보았다.


<가위손>:영화광인 그가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한 영화이다. 그는, 손에 달린 이상한 가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처럼 늘 자기 자신은 뭔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미완성품’이라고 말한 에드워드처럼 그도 자신을 ‘낙오자’라고 표현했다.

“나처럼 괴물 같은 자식을 낳아서 부모님이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제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현장 검증후 마지막 말)


<아비정전>:중학교 때 그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후 대학에서, 군대에서, 동호회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왕따 당한 경험 때문에 행여 사람들이 놀릴까 봐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과 벽을 쌓고 자신을 내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도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주인공을 그린 영화를 좋아했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그로 인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어떤 사소한 일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 그런 인물들을 다루는 왕가위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1995년 11월21일, 통신 동호회에 올린 글)


<킬러>(원제 내추럴 본 킬러):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그가 여러 차례 본 영화이다. 그는 이 영화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동호회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그가 경찰에서 밝힌 살해 동기처럼 <킬러>의 두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구박받고 무시당했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부모를 살해하고 끝없이 살인을 저지른다.

그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왕따의 아픈 기억이 있고, 부모로부터 끝없이 구박받았다는 것은 그의 살인 동기를 간접으로 설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부모를 죽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서는 두 주인공 미키와 말로리의 가정 환경이 불우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살인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일 뿐이지, 그 정도 부모에게 구박받고 자랐다고 살인마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1995년 10월23일, 통신 동호회에 올린 글)


<브로큰 애로우>:사건이 있기 며칠 전, 그는 부모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며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던 그는 오히려 부모로부터 ‘네가 못난 탓인데, 왜 부모 탓으로 돌리느냐?’며 면박만 당했다. 그는 결벽증이 있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어머니 사이에서 늘 부대꼈다. 가족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브로큰 애로우>는 그가 가족 간의 벽을 깨기 위해 선택한 영화였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 경험이 있는 그는 가족의 화해를 위해 비록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브로큰 애로우>를 빌려 화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택시 드라이버>:가족의 화해를 위한 그의 마지막 시도가 좌절된 후 세상으로부터 더 기대할 것이 없어진 그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나를 뭘로 알고 이러는 거야, 참는 데도 한도가 있다. 잘 들어라. 이 이상은 못 참는다. 모든 악과 부정과 싸우겠다. 절대로 용서 못한다”라고 말하며 총을 뽑는 <택시 드라이버>(그의 통신 동호회 아이디가 택시 드라이버이다)의 주인공처럼 결국 광폭하게 질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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