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는 정치권의 동네 북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7.01.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요하면 두드리는 정치권 단골 메뉴… 구속·해고 그치지 않는 민주화 사각지대
87년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빠른 속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유독 동토로 머물러 있는 곳이 있다. 다름 아닌 노동운동계이다. 이 기간에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사람 숫자는 그 전 시대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지만 노동운동계만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지난 9년 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구속된 인사가 2천여 명, 해고된 사람이 5천여 명을 헤아린다. 누가 보더라도 국민 소득 만달러,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국가의 통계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치이다.

노동계가 이같이 민주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정치권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권과 노동계가 지금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은 이번 여당의 노동법 기습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정부와 여당은 올해 정기국회에 앞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관계자까지 참여시켜 7개월여에 걸쳐 노동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최소한의 합의마저 무시하고 사용자측 입장만이 대폭 반영된 개정안을 일방으로 통과시켰다. 노동운동 지도부가 파업이라는 극한 투쟁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정부와 여당이 내몰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야당도 결코 노조 쪽에 유리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회의나 자민련은 노동법 개정안 중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야당은 여당이 노동법을 기습 처리하는 것을 방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도 받았다.

‘독자적 정치세력화’ 숙제 다시 떠올라

그동안 노동운동과 정치권의 관계는 매양 이런 식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 정부와 여당은 경제 정책이 실패한 책임을 노동운동에 전가하고, 선거를 보혁 구도로 가져가기 위해 정부와 노동운동 간에 주기적으로 긴장감을 조성해온 의혹이 짙다. 그리고 야당은 정부와 여당의 그같은 전략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동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온 것이다.

정부와 노동운동 간의 긴장감을 정국 운영에 가장 잘 활용한 정권은 6공이었다. 6공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총선에서 대패해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고 땅값 억제에 실패해 일대 위기를 맞았다. 그 때 6공 정부가 주목한 것이 마침 태동하고 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었다. 6공은 전교조 가입 교사들이 학생에게 의식화 교육을 하고 있다고 몰아붙여 교사들을 대거 강단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내친 김에 공안 정국을 조성해 정치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당시에 촉발된 색깔론 시비는 92년 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노동운동을 정국 운영의 돌파구로 삼는다는 시비는 문민 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95년 6월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서울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농성하고 있던 한국통신 노조원들을 대거 연행했다. 노사 간의 갈등에, 그것도 민주화운동의 성지 구실을 해온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때문에 성수대교 붕괴와 잇단 인사 실책으로 지방 선거 결과를 점칠 수 없게 된 정부가 노조를 자극해 선거를 보혁 구도로 치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나왔다. 실제로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노동 문제로 혼란할 경우 국민들이 보수화해 여당에게 표를 줄 수 있다. 노동자들은 아무리 억울해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자제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도 정부가 불필요하게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법 개정안 처리에는 정치적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과거 이런 상황에서 번번이 손해를 본 야당은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지도부가 총파업으로 맞선다고 해도 적극적인 지원을 꺼릴 것이다. 그럴 경우 노동계는 또다시 구속자를 양산하고 상처만 입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노조 관계자들의 입에서는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라는 해묵은 논제가 다시 튀어나오고 있다. 실제로 노동계 처지에서 보면 지금의 정치 상황은 아무리 억울해도 참거나 기성 정치권과 구별되는 정치 조직으로 변신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