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면 전환 위해 3자 설명회에 나온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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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원만한 권력 승계 위해 불가피…대가로 쌀 요구할 듯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 등 남북한을 둘러싸고 굵직한 사건들이 계속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머지 않아 외교 카드를 통해 전격적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끈질기게 제시되고 있다.

현재 국내외 정보 소식통들이 외교 카드로서 주목하는 것은, 북한이 그동안 중단해온 4자 회담을 위한 3자 설명회 참여를 전격적으로 선언하고 나온다는 것이다. 북한의 국면 전환 움직임을 주시해온 국내의 한 정보 소식통은 “앞으로 한반도 정세 일정에서 쌀 문제와 3자 설명회 문제, 그리고 미·북한 고위급 회담을 2월 안에 매듭짓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은 오히려 3자 설명회에 참여함으로써 황장엽 파문을 잠재우려 할 가능성도 존재한다”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3자 설명회 전격 참여 가능성과 관련한 구체적인 윤곽은 뉴욕의 한 재미 사업가로부터 확인되었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특히 뉴욕 소재 북한 유엔대표부 동향에 밝은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 하루 뒤인 지난 13일 한성열 북한 유엔대표부 공사가 마크 민튼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에게, 미국이 북한에 쌀을 지원할 경우 북한은 1주일 안에 4자 회담 설명회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북한측은 황장엽 비서 사건은 어차피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로 인해 기존 외교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시사저널>이 이 재미 사업가와 국제 전화로 인터뷰한 것은 지난 14일이었다. 당시까지 뉴욕에서 미·북한 간에 실무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내에 보도되지 않았다. 하루 뒤인 15일 뉴욕발 <연합통신>이 뒤늦게 ‘13일 북한과 미국 실무 접촉이 이뤄져, 쌀 지원 문제, 4자 회담 문제, 핵 문제 등이 논의됐다’고 짤막하게 보도함으로써 그의 발언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북한이 3자 설명회에 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에 접한 뒤 <시사저널>은 워싱턴과 제네바 등의 취재 라인을 동원해, 지난 2월 초 북한이 미국 카길사와 쌀 공급 협상이 결렬되어 3자 설명회 불참을 선언한 이래 어떤 움직임을 보여왔는가를 추적했다. 결론은, 북한이 카길사와 협상이 결렬된 데 대한 배신감으로 뉴욕의 유엔대표부를 통해 3자 설명회 불참을 대외적으로 선언하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적절한 복귀 명분을 모색해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양형섭, 참여 메시지 전하려 방미 시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 시도였다. 양의장의 미국 방문은 지난해 말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측이 매년 2월 초 미국에서 열리는 국가 조찬기도회에 그를 초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찬기도회 예정일은 2월6일, 그러나 이미 그 전에 카길사 협상 결렬과 함께 북한측이 3자 설명회 불참을 선언하는 등 미·북한 관계가 식기 시작해 주최측은 북한이 양의장의 방미를 취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북한은 예정대로 양의장 방미를 추진했고, 북경에 가서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을 기다리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의장 초청 과정에 깊이 관여한 워싱턴의 한 관계자가 전화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양의장 방문은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부정적인 입장 표명과 이를 받아들인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말미암아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주최측이 한·미 양국 정부에 불쾌한 감정을 품게 되는 등 좋지 않은 사례로 남게 되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양의장의 미국 방문 시도가 북한이 4자 회담 설명회 불참을 선언한 직후 이루어진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때까지도 설명회 참여 문제에 대해 진통을 거듭해온 북한 지도부가 양형섭 의장 방미를 계기로 설명회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으로 봐야 한다”라며 그의 방미가 무산된 것을 애석해 했다.

양의장 방미 파동을 겪은 이후에도 북한이 적절한 계기만 생긴다면 설명회에 복귀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난 11일 제네바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날 제네바에서는 북한대사관이 주최한 김정일의 55세 생일 기념 만찬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 만찬에 참석했던 국제 기독교 단체의 한 간부가 북한대사관의 고위급 인사에게 ‘4자 회담 설명회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묻자 그 고위급 인사가 ‘설명회에 곧 참석하게 될 것이다’라고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한 한반도 전문가는 “북한은 황장엽 사건을 미국과는 상관 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수세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주로 미국과 관련된 3자 설명회나 미·북한 고위급 회담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북한이 2월 초에 설명회 불참을 선언한 이래 적절한 복귀 명분을 계속 모색해 왔고, 황장엽 비서 망명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맞서 이를 국면 전환용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들의 본질을 설명해 주고 있다. 현재 이 모든 문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설명의 틀이 바로 상반기 한반도 정세 일정이다(<시사저널> 제378호, 97년 1월23일자 참조). 이 일정을 다시 들여다보면 왜 황장엽 비서가 바로 이 시기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북한은 왜 황장엽 비서 망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외교 무대 전격 복귀를 검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지난해 연말 내부적으로 설정한 이 정세 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앞으로 국내외 여건이 호전될 경우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4월로 앞당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실제로 이를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대내외 준비 과정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측이 당시 조기 권력 승계의 조건으로 상정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쌀 등 식량 확보였고, 두 번째는 대대적인 내부 인사 개편의 종결, 세 번째는 미국 연락사무소 개설을 정점으로 한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경우 2월16일 김정일 생일에 맞춰 4월 권력 승계와 관련한 중대 발표를 할 계획도 가졌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난 1월부터 북경 등을 무대로 끈질기게 나돌았던 ‘2·16 중대 발표설’의 내용이다.

그러나 금년에 들어서면서 쌀을 비롯한 식량 수급이 애초 계획과 달리 차질을 빚자 4월 승계 가능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1월 중순 열린 것으로 알려진 내부 회의에서는 ‘쌀 공급이 여의치 않을 경우 승계를 뒤로 미룰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황비서 망명에도 김정일 승계 일정 변화 없을 듯

그러나 내부 인사 개편 및 미·일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 일정은 올해 중 어느 때라도 김정일 승계가 이루어질 경우에 대비해 그대로 추진해온 것이다. 특히 황장엽 비서의 전격적인 망명과 깊이 연관된 것이 바로 내부 인사 개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인사 개편이 2월16일 김정일 생일에서 4월25일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 사이에 대대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는 사실은, 왜 황비서가 지금 이 시기에 황망히 망명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즉 이번 인사 개편에서는 김정일 시대가 본격 개막하기 앞서 김의 측근 신진 세력들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권력 그룹이 전략적 동맹 관계를 형성해 대대적으로 등장할 예정이었고, 이에 따라 황장엽 비서를 비롯한 노장 세력과 구세대 인물들의 퇴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북한의 권력 핵심부에서는 황비서 망명 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갈 사람이 나간 것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태도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황비서 망명 사건은 북측에 상징적 의미에서 타격은 되고 있지만 기존 승계 시나리오를 재검토할 만한 요인은 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외교적 대응을 통해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3월이나 5월로 예상되고 있는 미·북한 연락사무소 상호 진출은 승계의 필요 충분 조건으로 계속 작용하고 있다. 연락사무소 개설을 위한 마지막 협상이 본격화하려면 늦어도 2월 안에는 그 전 단계 프로그램인 3자 설명회와 미·북한 고위급 회담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2월 안에 이들 사안의 윤곽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현재 시점에서 3자 설명회에 대한 조건부 복귀를 선언하는 것이 여러 모로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다만 앞으로 한 가지 문제는 설명회에 복귀하는 대가로 미국이나 한국·일본 그리고 국제기구로부터 북한측에 어느 정도로 쌀 지원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또다시 문제는 쌀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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