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도 없이 떠나야 할 이기택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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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노선 바꾸자 ‘사퇴 정치’마저 실패…선거 후 ‘강요된 홀로서기’ 할 듯
“나가자니 갈 데가 없고, 눌러앉자니 가시방석이고….” 민주당 이기택 총재와 동교동이 ‘총재직 사퇴’ 카드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일 때, 이총재의 한 측근 의원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뇌까렸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손에서 줄을 놓자, 양쪽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깨졌다. 결국 이총재 역시 줄을 내버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가시방석에 눌러앉았다.

이총재는 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의 책임을 물어 권노갑 부총재가 물러나지 않으면 자신이 총재직을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가, 사흘 만에 말을 거둬들인 것이다. 지난 5월28일 이총재가 북아현동 자택에서 ‘조건 없는 당무 복귀’를 선언할 때, 동교동계를 밀어붙이던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었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총재가 돌아오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라고까지 했다.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는 소리로 들린다.

동교동 ‘이총재 효용 가치 없다’ 판단

애초에 총재직 사퇴 카드를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총재 진영도 이를 전술적 실책으로 판단한다. 전쟁을 앞두고 장수가 분열을 자초했다는 당내외의 비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게다가 지난해 말 12·12 투쟁 때부터 불과 6개월 사이에 세 차례나 이어진 이총재의 잦은 사퇴 발언은 ‘떼쓰기 정치 수준’으로 비쳤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이총재 진영에서도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총재의 당무 복귀 선언은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나 진배없다. 굳이 얻은 것이 있다면, 김이사장의 마음이 이총재로부터 떠났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는 점이다. 김이사장의 정국 구상에서 이총재는 더 이상 효용 가치를 상실했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이는 이번 총재직 사퇴 소동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동교동계는 총재직 사퇴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총재 권한 대행 체제로 돌입하려는 과정을 밟았다. 현재 동교동은 이총재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동교동의 한 핵심 측근 의원은 이총재가 당무 복귀를 선언했는데도 “이총재는 앞으로 얼마든지 그만두겠다고 할 사람이다. 선거운동 기간에 ‘사퇴병’이 재발하면 정말 선거를 망치는 행위다”라고 쏘아붙였다. 이총재의 ‘이적 행위다’에 대해서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을 이총재가 모를 리 없다. 자기가 민주당 내에서 이미 용도 폐기되었다는 점을, 다른 사람도 아닌 김이사장의 입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이사장은 국민대 행정대학원 초청 강연에 이어 여수 강연에서도 “자민련 출범은 특정 지역, 특히 부산·경남 지역에 의한 지역 패권주의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YS와 DJ, 그리고 JP와 TK가 서로 수평적으로 지역을 분할 점령하는 구도가 지역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즉 4개 지역 영주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타협과 협상을 통해 한국 정치의 미래를 가꿔나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지난 4월 승가 대학에서 내각제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한 자신의 발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기택 총재의 정치적 운명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지역 분할 구도에서 이총재의 세력은 미미하다. 이총재가 기대를 걸고 있는 영남의 야권 세력은, YS와 TK 밑에서 싹도 틔우지 못하고 있다. 이총재의 한 핵심 측근은 “최근 김이사장의 발언은 전국 정당을 추구했던 민주당의 기본 노선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남의 야권 세력을 대표했던 이총재가 할일은 더 이상 없다”고 진단한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총재와 김이사장이 야권 통합을 이룰 당시의 통합 정신은 민주당에서 무용지물이 됐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김이사장 스스로 지역 감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라고 밝히는 마당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다만 이총재가 지금 정면 승부를 걸기에는 세력이 너무 부족해서, 그처럼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총재 직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민주당 주변의 분석이다.

결국 이번 선거가 끝나면 이총재는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할 상황이다. 더구나 그 홀로서기는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라 강요된 길이 될 공산이 크다. 당 내분이 극적으로 봉합됐는데도 어느 계파도 표정이 밝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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