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이미지 전쟁에서 패했다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7.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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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평가에서도 이인제·조 순·DJ에 뒤져… 김대중, 경제·통일 전문가 이미지 확고
바야흐로 ‘이미지 전쟁’이다. 이미지 시대에 걸맞게 정치 무대 또한 광장에서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옮아갔다. 역대 선거와 비교해 올 연말 대선은 뚜렷한 특징을 두 가지 갖고 있다. 첫째는 영남권 후보가 없어 상대적으로 지역색이 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텔레비전 토론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선거판을 좌우했던 지역 대결과 색깔 논쟁 따위 ‘낡은 축’으로부터 후보간 이미지 전쟁이라는 ‘새로운 축’으로 게임의 양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각당도 이미지 전쟁에 몸이 바짝 달아 있다. 특히 텔레비전 토론 자체의 영향력과, 텔레비전 토론이 끝나자마자 각 인쇄 매체가 쏟아내는 여론 조사 결과가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빚어내는 파급력은 각당 홍보 관계자들의 피를 말리고 있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시대이듯, 정치 역시 ‘후보자의 모든 것’을 내다 파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후보들은 주부 대상 프로인 아침 토크 쇼에 출연하기 위해 요리와 노래를 배우고 승마장에까지 달려가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당은 당대로 후보자의 생애를 엮어낸 홍보 책자를 만들어 이미지의 전쟁터인‘미디어 시장’에 내놓고 있다. 심지어 후보자의 다양한 여성 편력도 표 모으기에 활용하는 판국이다.

‘대쪽 이미지’가 ‘귀족 이미지’로 변질

그렇다면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조 순 이인제 다섯 주자가 그동안 이미지 전쟁에서 거둔 ‘중간 성적표’는 어떻게 나올까. <시사저널>은 연말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후보 선택 기준으로 꼽는 △도덕성 △정치 보복 가능성 △경제 위기 돌파 능력 △공정한 인사 여부 △통일 실현 등 다섯 항목에 걸쳐 각 후보자가 쌓아온 정책 이미지를 중점 평가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회창이 거의 전항목에 걸쳐 전반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반면, 김대중의 상승세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우선 ‘도덕성 항목’에 대한 평가이다. <시사저널>은 응답자들에게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가장 도덕적이고 깨끗한 정치를 할 것 같은 후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유권자들은 이인제(20.0%) 조 순(17.4%) 김대중(16.1%) 이회창(13.9%) 김종필(4.5%) 순으로 답했다. 이회창이 92년 대선 때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한 김대중보다 도덕성에서 더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두 아들의 병역 문제로 인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지만 ‘미스터 클린’으로 상징되어 온 이회창으로서는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회창의 강점은 특유의 ‘대쪽 이미지’에서 풍기는 높은 도덕성과 원칙성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데, 이 항목에서조차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한 것이다. 이는 이회창이 이미지 전쟁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원인은 역시 병역 파동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이 정도로 나온다면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병역 시비로 인해 대쪽 이미지가 ‘귀족 이미지’로 변질되면서, 강점은 사라지고 약점만 도드라지는 것이다. 혈혈 단신이던 정치 신인을 집권 여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끌어올렸던 이회창의 도덕적 이미지가,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앞길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 요인으로 떠올랐다. 이는 후보자의 이미지를 어느 한쪽으로만 집중 개발하는 전략이 그만큼 ‘위함한 도박’이 될 수도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치 보복 가능성을 묻는 항목에서도 이회창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시사저널>은 ‘집권하면 정치 보복을 가장 하지 않을 후보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사안의 성격상 유도성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 정치 보복을 할 가능성을 묻지 않고, 보복하지 않을 가능성을 순위로 매겨 보자는 뜻이었다. 이회창은 조 순(18.4%) 이인제(15.8%) 김대중(15.3%)에 이어 11.6%로 4위로 지목되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이회창은 위의 세 후보보다 집권 후 정치 보복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묘한 것은 이회창의 ‘대쪽 이미지’가 국민들의 심리 기저에 부정적인 쪽으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도덕성을 묻는 항목에서는 병역 문제로 대쪽에 대한 실망감이 집중 부각된 반면, 정치 보복 가능성을 묻는 항목에서는 대쪽에 대한 우려감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으로서는 ‘벙어리 냉가슴’ 처지이다. 이는 이회창의 정치 보복 가능성을 우려하는 여론이 주로 여당 고정 지지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47.1%)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신한국당 경선 당시 제기되었던, 정치 보복을 할 가능성 때문에 이회창은 안된다는‘이회창 불가론’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위기를 돌파할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항목에서는 김대중이 1위(26.0%)를 차지했다. 그 뒤로는 조 순(20.9%) 이인제(12.8%) 이회창(8.9%) 김종필(7.9%) 순이다. 김대중이 경제 전문가 이미지에서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데에는 호남 지역 응답자들의 압도적인 지지(72.5%)가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 순을 지목한 응답자들은 지역 별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

비록 호남 지역에 응답자들이 집중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김대중이 경제 위기 돌파 능력에서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 출신인 조 순을 앞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만큼 어렵고, 따라서 올해 선거에서는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한 정책 대결 양상이 어느 때보다 격렬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국민회의가 최근 대선 컨셉을 ‘준비된 대통령론’으로 잡은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즉 야당의 수권 능력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을 불식하겠다는 것인데, 준비된 대통령론의 핵심이 바로 경제 정책 홍보이다.

조 순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경우다. 민주당은 조 순 자체가 워낙 경제학자라는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어 특별한 노력 없이도 얼마든지 득점 포인트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민주당의 대선 전략은 ‘3김 시대 청산’과 함께 ‘경제 대통령 조 순’을 적극 부각한다는 데 맞추어져 있다.

현정권의 실책 가운데 하나인 편향적인 인사 정책도 연말 대선에서 각 후보가 도마 위에 올릴 단골 메뉴로 꼽힌다. ‘지연·학연·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한 인사를 할 것 같은 후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서는 후보 간에 별 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응답자들은 김대중(15.7%) 이인제(15.6%) 조 순(13.9%) 이회창(13.0%) 순으로 비교적 고르게 지목했다.

DJ ‘통일 대통령’ 홍보 성공

마지막으로 남북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후보를 묻는 항목에서는 김대중이 압도적으로 1위(34.7%)를 차지했다. 김대중은 적어도 ‘통일 대통령’ 이미지 홍보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독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인제(6.5%) 이회창(6.4%) 김종필(4.7%) 조 순(3.7%)은 모두 지목 빈도 10% 미만을 보이며 통일 문제 해결에 관한 한 고만고만한 후보들로 평가되었다.

김대중이 이처럼 통일 시대의 지도자 이미지를 독점하는 것은, 물론 ‘색깔 시비’를 일으키면서까지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남북 문제에 대한 전문성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김대중이 정계 복귀의 발판으로 삼았던 아·태재단도 남북 문제에 연구 역량을 집중 투입하고 있으며, 정치권에 ‘다 죽었던’ 김대중 이름 석 자가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주선하면서부터이다. 현정권의 오락가락한 대북 정책도 DJ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데 반사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DJ는 주로 20대 젊은층(42.2%) 대졸 이상 고학력층(43.2%) 학생(54.8%) 화이트칼라(41.4%)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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