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참된 시작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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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 아내 김진주씨, 남편 석방 탄원…“그가 자유로워야 진정한 자유민주 국가”
김진주씨는 7월24일 경주교도소에서 남편 박노해씨(본명 박기평)를 처음으로 특별 면회했다. 그 자리에는 김씨의 시아주버니인 박노해씨의 친형 박기호 신부(석관동 성당)도 함께했다. 82년 명동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린 뒤에 부부이자 동지로서 직업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 두 사람이 91년 3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체포된 이후 거의 4년반 만에 처음 잡아보는 손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4년형을 살고서 지난 5월1일 홍성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 김씨는 그동안 몇 차례 남편을 찾았으나 특별 면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범 관계에 있는 출소자와 재소자 사이에는 일정 기간 면회를 금하는 행형법상의 규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5년째 생이별한 부부임을 고려한 교도소측의 특별 배려로 이 날 특별 면회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박기호 신부에게도 형제지간이 아닌 신부로서‘재소자에 대한 교화 차원에서’ 특별 면회가 허락되었다.

박노해씨, <중용> 등 독서 몰두…절필은 계속

김씨에 따르면, 박노해씨는 지금 교도소에서‘처절한 공부’에 빠져 있다. 동요·동시집에서부터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있지만 그가 주로 빠져 있는 책은 동양철학과 생명사상에 관한 것들이다. 최근 <중용>을 공부하고 있는 박씨는 면회온 아내에게 장일순 선생이 해설한 <노자>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혁명 시인 박씨의 변화는 유신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반체제 시인 김지하씨의‘전향’ 또는‘귀의’를 떠올리게 한다(그러나 김진주씨는 김지하씨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고 했다).

박노해씨는 이번 면회 때 삼풍 참사를 말하면서 자신의 소견을 덧붙였다. 구조된 3명이 모두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신세대 노동자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면서, 앞으로는 자기가 몸담았던 현장에서의 노동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신세대의 건강한 낙관성을 고려한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삼풍 참사에서 국가의 빈 자리를 가족들이 메우는 것을 보고서 가족 공동체의 위대한 힘을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교도소 안에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을 하고 있는 박씨는, 아내 김씨에게 인간의 몸과 우주는 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느니, 몸의 건강이 곧 사회의 건강이라느니 하는 어디서 들었음직한 말도 많이 했다. 그는 출소하더라도 농촌에서 살겠으며, 앞으로 10년 동안은 운동이나 글쓰기보다는 공부에 더 치중하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의 이런 최근 모습을‘도사’에 비유했다.

면회실에서 동생의‘고해성사’ 같은 말들을 주로 듣기만 하던 형은 동생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박신부는 “감옥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고 체계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고 겸손하라. 과거에 집착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네가 발견한 새로운 것도 10년 뒤에는 다시 낡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일렀다. 책 욕심 내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박노해씨는‘처절한 공부’와는 상반되게 4년째 절필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절필은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의 글쓰기는 계속하지만 바깥 세상에서 책을 내거나 자신의 생각을 외화하려는 목적의 글쓰기는 안한다는 것이다. 80년대에 가장 주목 받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인 그는 감방 안에서 시는 계속 쓰고 있지만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고 있다. 상고 이유서에 덧붙인, 서울구치소에서 쓴 시 50편이 그가 바깥 세상에 내보인 글쓰기의 전부일 뿐이다(이 시편들은 93년 창작과비평사가 <참된 시작>이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펴냈다).

그는 4년째 편지도 안쓰고 있다. 1심 재판이 끝난 뒤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에게도 일절 편지를 끊었다. 김씨 또한 남편에게 부담이 될까 봐 남편한테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김씨는 10여 년을 부부이자 동지로 살다 보니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느낌이 있어 괜찮다고 했다. 김씨는 자신의 근황을 “절반은 갇혀 있는, 나머지 절반의 자유”라고 표현했다.

김씨가 옥중에서 고민했던 것도 대중성 문제였다. 나름대로 몸을 던져 헌신한 운동을 대중과 공유하지 못한 데서 오는 반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옥중에서도 대중성이 있는 이른바 베스트 셀러를 주로 탐독했다. 그가 옥중에서 가장 괴로워했던 시기는 명지대 강경대군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91년 5월의 분신정국 때였다. 그가 규정했던 혁명적 고양기에 쓴 ‘목숨 바쳐 싸우라’는 글들이 이 젊은 후배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하는 회의와 혼란스러움이 내내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그는 박노해씨와 함께 월간 <노동해방문학>에 노동운동가 한승호라는 필명으로 당시 정세를‘퇴조기의 막바지’이자‘정세 역전의 고비’라고 규정하고 노동자·민중 혁명을 선동하는 글을 정력적으로 연재했다).
김진주씨, 감옥 소재로 글 쓸 계획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과 한승호의 글들은 분명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전선이 너무나 명확했던 80년대에 민주 진영의 최전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연대는 전투성과 진정성이 자연스레 동거하고 혼융될 수 있는 행복한 시기이기도 했고, 때때로 전투성이 곧 진정성의 척도가 되어 버리기도 한 불행한 시기이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피를 말리는 수배 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남편이 안양에서 버스회사 운전 기사로 일하고 자기는 공장에 나갔던 신혼 시절의 월세방 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때 월세방에서 소모임 활동에 참여했던 안내양들한테서만큼은 지금도 편지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김씨는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직업 혁명가로 나섰던 지난 10년의 삶과 4년의 옥살이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김씨가 박노해씨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그 시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 뿐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다만 주위에, 특히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는 앞으로 박노해의 처가 아닌 김진주라는 이름으로 대중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출소한 뒤 어떤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은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가 대중과 만나려는 방식은 글쓰기(시와 소설)이다. 시를 30편 정도 썼는데 백편을 채우면 내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가 체험한 감옥을 소재로 죄와 벌 그리고 구원에 관한 주제로 작품을 구상중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절반의 부자유’를 극복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몸이 많이 상한 그가 가장 최근에 혼신의 힘을 다해 끝낸‘작품’은 탄원서이다. 김씨는 박노해 시인의 석방을 청원하는 이 탄원서를 지난 7월29일 김영삼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앞으로 냈다. 김씨는 탄원서에서‘박노해는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고 지금 그는 참된 시작을 위한 구도자입니다. 새롭게 자신을 정립하여 참된 시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며 수도 정진하고 있는 박노해가 갇혀 있다는 것은 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군사 정권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에 다름 아닙니다. 그가 자유로울 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박노해씨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4백27명이 서명하고, 천주교인권위원회(고문 김승훈 신부)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석방을 건의한 양심수 17인 가운데 1명이다. 천주교인권위는 천주교 신자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자인 방북사건의 서경원 전 의원(58·징역 10년형)과 사노맹 관련 사건의 은수미씨(33·징역 5년형) 그리고 박노해씨(38·무기징역)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건의했다. 또 민족문학작가회의도 이번 사면에서 황석영씨와 박노해 시인이 함께 석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박노해 시인은 90년 12월 한 월간지에 투고한 글에서, 노동자 시인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변모한 자신에 대해 “나는 이 땅의‘작품’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제 다시 그는 반성을 토대로, 옥중에서 풀려나와 이 땅에서 더 좋은 작품으로 쓰이기를 고대하고 있다. 김씨는 박노해 시인의 진정성의 보기로 수감중에 쓴 시 <그해 겨울나무>를 들었다.

박노해 시인은 이 시의 첫 연의 끝을‘그해 겨울,/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로 시작해 마지막 3연의 마지막 행을‘그해 겨울,/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로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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