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개혁과 그 적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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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 세력의 반격·여소야대·자민련과 충돌 등 ‘수두룩’… 통치 철학 세우고 영남 포용해야
그것은 환상의 대역전극이었다. 프랑스에 3 대 0으로 지고 있던 독일은 후반전 종료 15분을 남겨두고 루메니게를 투입했다. 부상으로 줄곧 벤치에 앉아 있다가 뒤늦게 뛰어든 루메니게는 순식간에 3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연장전에서 독일은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10년 전 유럽컵 축구 결승전 장면이다. 경기를 끝까지 지켜본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선수 한 사람의 역량이 저토록 승패를 결정하는구나!”라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정치도 지도자 한 사람의 리더십과 활약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정치학자들은 강조한다. 더구나 대통령 한 사람이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나라가 0패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뛰어든 루메니게와 비슷한 처지이다. 과연 김대통령은 IMF 체제라는 엄청난 경제 위기와 여소야대, 수구 세력의 반격 등 온갖 악조건을 뚫고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을까.

마침내 김대중 시대가 열렸다. 2월25일을 기해 말 많고 탈도 많았던 YS 시대가 가고 새로운 DJ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 앞에는 험한 가시밭길이 놓여 있다.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이 가시밭길을 잘 헤쳐 가야 한다.

우선 김대통령이 개혁에 성공하려면 확고한 통치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YS 개혁이 실패로 끝난 가장 중요한 원인도 통치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YS는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보수의 길을 걷다가 때로는 극우와 혁신이라는 정반대 길로 내달리기도 했다. 갈팡질팡했던 통일 정책이 단적인 예에 속한다. 한마디로 YS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탓에 결국 모든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이에 비해 김대중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굳이 명명하자면 ‘보수적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을 단기적으로는 서서히 추진하되 중·장기적으로는 과감하게 전개하는 점진적 개혁주의를 의미한다. 김대통령은 말로는 온건 개혁론을 펴지만 실제로는 과감하게 개혁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통령이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개혁이 권위를 얻어야 하고,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국민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이를 위해 첫째 역사적 정통성, 둘째 합법적 정통성, 셋째 카리스마적 정통성을 획득해야 한다.

이 중에서 김대통령에게 적어도 역사적 정통성과 카리스마적 정통성 대목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임도 하기 전에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과 80년 내란 음모 사건의 진상이 속속 밝혀지는 것을 보면, DJ에 대한 ‘역사 바로 잡기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의 비범한 능력과 자질을 뜻하는 카리스마 역시 DJ에게는 문제가 안된다.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 탈일 정도니까.
자민련 인사들은 잠재적 수구 세력?

문제는 합법적인 정통성을 얻는 일이다. 정치 현실에 대비하자면 제도적·법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적 청산에는 성과를 거두고도 제도적 청산에 실패해 모든 것을 까먹은 YS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DJ는 인적 청산 못지 않게 제도적 청산에 주력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개혁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 앞에 가로놓인 장애물은 너무나 많다.

당장 김대통령이 뛰어넘어야 할 높은 장벽은 여소야대 정국이다. 88년 13대 총선에서 탄생한 여소야대 정국 때 여당이 얼마나 골탕을 먹었고 반대로 제1 야당인 평민당이 그 덕을 얼마나 톡톡히 보았는지 당사자인 김대통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초, 한나라당은 청문회법안 등을 강행 처리해 거대 야당의 위력을 단단히 보여 주었다. 제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를 만들려고 해도 거대 야당의 벽을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DJ는 머지 않아 이 벽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김종필 총리 인준 과정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듯이 한나라당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7월 지방 선거를 전후해 쪼개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조차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장애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복병, 바로 수구 세력의 반격이다. 이들은 개혁 바람이 거셀 때는 바짝 엎드려 지내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반격을 가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군부와 관료, 재벌, 소수 특권층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
김종필 명예총재를 비롯한 자민련 사람들이 보수적 개혁 세력에 포함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 같은 진보적인 학자조차 JP를 크게 보아 ‘개혁적 보수’ 범주에 포함하며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굳게 연대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종찬 인수위원장과 김중권 비서실장 등 5,6공 출신 신실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이들이 때가 되면 개혁에 제동을 거는 잠재적인 수구 세력이 되리라고 주장한다. 당료파 중에도 이런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실제로 노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정책을 놓고 대립할 소지는 꽤 많다. 예컨대 통일 정책만 하더라도 DJ와 JP는 너무 다르다. IMF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민회의측 유종근 특보와 자민련측 김용환 부총재가 사사건건 충돌한 것이나, 국정 지표 가운데 하나인 ‘민주적 시장 경제’의 의미와 범위를 놓고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내각제 개헌을 놓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정면 충돌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직은 양쪽이 함구하고 있지만 막상 공론화하면 날카롭게 대립할 만한 ‘뜨거운 감자’가 내각제 개헌이다. 만에 하나 국민회의가 ‘딴 생각’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DJ 개혁의 핵심 중의 하나는 단연 재벌 개혁이다. 김대통령은 취임 이틀 전(2월23일)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과 가진 회견에서 ‘재벌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모든 특혜를 박탈하겠다’며 사실상 재벌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김대통령은 현재 재벌들이 거느리고 있는 30∼40개 계열 기업을 3∼6개로 줄여 재벌 해체를 시도할 것으로 보여, 앞으로 DJ와 재벌 간의 전쟁이 꽤나 치열할 것 같다.
“인사 잘하면 개혁은 저절로”

김대통령이 대화합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영남을 끌어안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YS가 개혁에 실패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른바 PK 인맥으로 불리는 특정 지역 출신을 지나치게 배려한 데 따른 다른 지역의 반감 때문이었다. 특히 TK 민심은 집권 5년 내내 YS를 무겁게 짓눌렀고, 이번 대선 때는 DJ에게도 큰 반감을 보였다. 김대통령이 새 정권의 초대 비서실장에 TK 출신인 김중권씨를 기용한 것이나, 역시 이 지역 출신인 이수성 전 총리를 영입하려고 공을 들이는 것도 대화합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정권은 요즘 DJ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TK 민심을 잡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펼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대통령이 개혁보다 우선 순위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인사이다.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인사만 잘 하면 개혁이고 뭐고 다 해결된다”며 ‘인사 지상론’을 폈다. 엄밀히 말하면 YS도 개혁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인사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측근은 조조가 유비와 손권의 협공을 물리친 것도 사마의라는 무명의 서생을 과감하게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의 인사는 어떠한가. 청와대 비서진과 각료 인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전처럼 깜짝 인사나 문제투성이 인사도 없었다. 다만 권영민 의전비서관 내정자가 청와대에 들어가기도 전에 석연찮은 이유로 바뀐 사례가 보여주듯이 불안한 대목도 없지 않다.

김대통령이 지나치게 과거와의 연속성을 꾀하려고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두환·노태우 등 역사적인 범법자를 지나치게 환대하고 구여권 인사들을 너무 요직에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회의의 한 인사는 “DJ가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잡은 탓인지 매사에 너무 조심스러운 것 같다”라면서, 개혁 세력의 후퇴는 곧바로 수구 세력의 반격을 초래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겉으로 개혁을 표방하든 보수를 표방하든, 근본적으로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요즘 김대통령이 쏟아내고 있는 매우 진취적인 정책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과연 김대통령은 뒤늦게 녹색 필드에 뛰어들어 대역전극을 창출한 루메니게처럼 될 수 있을까. 많은 국민이 IMF 한파 속에서 DJ의 대역전 드라마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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