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지워진 살인마의 추억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r)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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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유영철의 80분짜리 비디오 테이프와 사진에는 행복한 시절만 가득했다. 가족만을 사랑했던 유씨는 사망·자살·이혼으로 가족이 깨지자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다. 절망은 살인에 이르는 병
‘희망초등학교 3학년 4반 9번 유영철.’ 유영철씨(34)는 노트에 꼬박꼬박 ‘희망’을 적었다. 초등학생용 노트에는 유씨가 수집한 ‘추천 부동산’과 아들에게 줄 선물, 그리고 가볼 만한 여행지 정보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희망 노트’ 후반부는 칼과 총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렇다. 유씨는 칼과 총으로 희망을 이루려 했다.

유씨는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서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손재주가 좋았다. 그래서 친척들은 유씨가 기술자나 화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희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부터다. 중학 1학년 때인 1984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동 일로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서울 미아리 세안병원에서 40여 일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숨을 거두었다. 당시 어머니 김씨가 이혼 상태여서 유씨는 형과 함께 병수발을 들었다.

학교를 빠지지는 않았지만 공부와는 멀어졌다. 이 때부터 인정이 많고 차분했던 유씨는 주위가 산만하고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지방에서 미곡상회를 운영하는 유씨의 작은아버지(55)는 “영철이가 아버지가 쓰러지고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다니는 둥 마는 둥해서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도 빠지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교회에 나갔지만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1988년 고등학교 2학년이던 유씨는 서울 성동구에 있는 한 가정집을 털다가 붙잡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이 때부터 평범한 학생과는 전혀 다른 사고뭉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21세 때인 1991년 안마시술소에서 안마사로 일하던 황 아무개씨(33)와 만나 동거하면서 유씨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유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제주도로 신혼여행도 갔다. 고향 마을에도 자주 들렀다. 아버지 산소에 들르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벌초도 직접 했다.

유씨는 친척들로부터 ‘영철이가 결혼하더니 속 차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유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유씨의 작은 어머니는 “사진 기술이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확실히 하라’고 했더니 ‘걱정 말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94년 두 살 터울 형이 세상을 떠나자 유씨는 좌절했다. 실명 상태인 한쪽 눈이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자학하던 형이 자살을 택한 것이다.

유씨의 아버지와 형이 지병인 간질로 사망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는 간질 증세가 있었으나 증세는 심하지 않았다. 사망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다. 유씨의 친척과 지인들은 “영철이가 왜 아버지가 간질로 죽었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1993~1995년 간질 증세로 국립서울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다. 하지만 가까운 친척들조차 그와 형에게 간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씨의 작은아버지는 “그럴 리가 없다”라고 단언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간질은 뇌세포가 손상되어 발생한다. 간질이 있는 사람은 증세가 노출될 것이 두려워 더욱 정리정돈을 잘하는 등 결벽증을 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경찰 불심검문에 걸리면 일부러 간질 증세를 일으켜 검문을 벗어나곤 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기동수사대에 붙잡히고 나서도 간질 증세를 일으켜 달아났다. 기자가 유씨의 가족에게 유씨가 간질을 연기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가족은 “경찰이 놓친 책임을 면하기 위해 과장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형의 자살로 인한 충격은 그 해 10월 아들이 태어나면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씨는 비디오카메라로 아기를 찍는 것이 취미일 정도로 가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때도 손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유씨는 이 기간에도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이 했다. 주로 도둑질로 ‘별’을 달았다. 빨랫줄에 걸린 경찰복을 훔쳐 절도에 나서는가 하면, 경찰 신분증을 위조해 자동차를 훔쳤다. 폭행 사건은 없었다. 열세 차례에 걸쳐 8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2000년 3월 유씨가 강간죄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자 아내 황씨는 곧바로 이혼소송을 제기해 유씨는 이혼을 당했다.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겼다. 지인들은 이 때부터 유씨의 성격이 포악해졌다고 한다. 유씨의 여동생은 경찰에서 “오빠가 원래 대인기피증이 있었는데, 이혼을 당하고 나서는 증세가 심해졌다”라고 말했다. 표창원 교수(경찰대·범죄심리학)는 “절도와 성폭행범이라는 죄목으로 인해 교도소에서 상당히 무시당했을 것이다. 여기에다 이혼을 당하면서 세상에 대한 폭넓은 적개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주교도소 수감 중에는 다른 수형자와 싸워 독방 수감 징계를 두 차례 받았다. 전주교도소 한 관계자는 “170cm 정도로 체격이 왜소한 유씨는 운동이나 싸움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주 조용한 수형자였는데 가끔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라고 말했다. 신창원이 복역하고 있던 청송감호소로 이감된 것도 수형 태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송감호소 관계자는 신창원과 달리기를 하고 팔씨름을 해서 이겼다는 일부 보도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유씨는 전주교도소에서 3년6개월 형을 살고 2003년 9월11일 출소했다. 그리고 불과 13일 뒤인 9월24일 서울 신사동에서 일흔이 넘은 노부부를 망치로 때려 숨지게 했다. 10월9일에는 서대문구 구기동에서 85세 할머니를, 11월18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87세 된 할아버지를 살해했다. 경찰은 이 때부터 유씨가 ‘살인의 맛’을 본 듯했다고 말했다. 유씨가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동기는 명확치 않다. 살해된 사람들은 중산층이었지 부유층이 아니었다. 유씨가 부유층을 노린 것이 아니라 범행하기 쉬운 장소와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을 고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말 언론을 통해 그의 살인 행각이 집중 부각되자 그는 잠시 살인을 멈추었다. 그 시기는 전화방을 통해 알게 된 김 아무개 여인과 사귀던 시기와 일치한다. 유씨는 김씨에게 청혼했으나, 전과자·이혼남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자 유씨는 출장 마사지 여성을 주적으로 삼고 ‘광란의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중순부터 전화방·출장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11명을 살해했다. 시체는 15~18 토막으로 절단해 암매장했다. 유씨는 160cm가 넘거나 살이 찐 여자들은 범행 상대로 생각지도 않았다. 유씨는 경찰관에게 “못생긴 애들은 아예 상대하지 않았고, 키 크고 무거운 애들은 버리기 힘들기 때문에 피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7월18일 오전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던 유씨는 “이 기회에 여성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부유층도 각성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부패한 권력층에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현세 만화의 까치와 닮아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유씨는 노트에 이현세 만화의 주인공 까치와 여러 장면을 전문가 뺨치는 솜씨로 그렸다. 그의 ‘희망 노트’ 옆에는 이현세의 만화 <애수의 하모니카>가 꽂혀 있었다.

유씨는 ‘인면수심’의 살인마 행각을 벌이면서 돈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유씨는 좀도둑 행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씨는 지난 1월20일 신촌의 한 불가마에서 현금 4만원과 상품권 등을 훔친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풀려났다. 5월7일에는 서울 영등포의 한 모텔 앞에서 위조한 경찰 신분증으로 출장 마사지 여성에게서 1백28만원을 빼앗았다. 표창원 교수는 “대중에게 자신을 의적과 같은 이미지로 각인함으로써 자신의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범죄의 중화작용’이다. 외국의 연쇄살인범과 지존파 사건도 비슷한 양상이었다”라고 말했다.

7월11일 유씨는 아들(11세)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형 집에 들렀다. 할머니 제삿날이었다. 이 날 유씨는 정성스럽게 제수를 준비하고 뒷정리도 도맡아 했다고 한다. 가족은 유씨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씨는 가족에게 자신의 거주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한 친척은 “제주도에 있는 한 할인마트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리를 잡았는지 아주 편안해 보였다”라고 말했다.

작은아버지는 “철이 좀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손주를 본 내게 친손주와 외손주 중 누가 더 이쁘냐’고 물어봐 이 놈이 나이를 좀 먹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유씨의 친척들은 “영철이가 아이 이야기만 했는데 천벌을 받을 일을 했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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