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넓은 '아버지의 그늘'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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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 사주는 누구인가/
선친·기자에 복잡한 감정…술 관련 일화도 허다


김병관 명예회장은 중앙고와 고려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1968년 총무국 관리부 차장으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판매국과 광고국 국장을 거쳐 1989년 사장이 되었으니 20년 넘게 경영 수업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경영자로서 그의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동아의 경영 책임을 맡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는 언론 시장에서 동아를 현상 유지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동아일보〉 출신 원로들은 그 원인을 김병관명예회장과 아버지 김상만 전 회장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내로라 하는 인재에 둘러싸인 김상만 전 회장은 아들을 내내 못미더워했다. 그는 아버지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보다는 주변 인물들을 더 아꼈다고 한다. 얼마나 아들에게 무심했던지 결혼한 후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아 김병관씨는 10년 넘도록 셋방살이를 했다. 심지어 김회장은 1980년대에 동아일보사를 김병관씨가 아닌 몇몇 측근 인사들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비친 적도 있었다.


김상만 회장은 또 아들에게 편집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이는 기자를 '지사'로 인식해 경영자와 동격으로 보던 인촌 김성수 선생과 김상만 회장의 소신이었다. 김병관 명예회장이 기자 직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기자들이 그렇게 엄격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대들고, 목숨을 걸고 독재 권력에 맞서는 것을 보면서 기자에 대한 외경심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씨는 기자들에게 '호기 있고 술 잘 마시는 사람'쯤으로 기억되고 있다.


명예회장이 되기까지 김씨를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동아일보〉 전 기자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주변인을 의식하는 버릇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김씨로 하여금 동아일보사를 파행으로 이끌게 한 원인이다"라고 지적했다. 김명예회장의 주변인 의식은 그를 〈동아일보〉 조직에 깊숙이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한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그 간극을 술로 메우려고 하는 것처럼 비쳤다고 한다.


술에 관한 김명예회장의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느닷없이 편집국에 들어가서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 폭탄주를 먹이는가 하면, 낮술을 먹고 편집국에 들어가 기자들을 붙잡고 횡설수설할 때도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기자에게는 술김에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가끔 인터뷰를 하러 내방한 외부 인사에게 실수를 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회사의 대표인 김명예회장이 밖에서 실수라도 할까 늘 노심초사했다. 지난해 10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강연 때는 그의 고약한 술버릇이 여과 없이 세상에 알려졌다. YS가 학생들과 대치할 때 김명예회장이 대취해 나타나 추태를 보인 것이다. 그의 술주정은 〈오마이뉴스〉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주변 우려 뿌리치고 아들을 기자로 입사시켜




실제로 아버지와 편집국에 대한 부담감은 그가 회사를 경영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는 사장 취임 후 당시 〈동아일보〉의 대표적 논객이었던 김중배씨를 국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김중배씨를 좌파로 여겼던 김상만 전 회장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아버지에 대한 김명예회장의 첫 반항이라고 말한다. 이후 김명예회장은 아버지가 총애하던 일부 고위 간부를 주주총회에서 해임하는 과감성마저 보였다. 언론계에서는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이 쇄신될지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다. 1989년 〈한겨레〉가 창간되어 전통적인 야당지의 위상을 위협받던 〈동아일보〉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했다.


그런데 김명예회장은 사장으로 있던 1991년 8월 김중배 국장을 편집국장 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김병관 사장은 편집국에 회람을 돌려 '동아가 사회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고 극소수 반체제 인사들에 의한 성토의 광장으로 이용될 소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밝혔다. 김국장이 기용한 일부 필자가 〈동아일보〉의 친일을 비판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김사장은 당시 술자리에서 김중배 국장에게 "내 인사가 아니다. 미안하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첫 개혁'에 실패한 뒤 그는 눈에 띄게 보수화의 길로 치달았다. 〈동아일보〉 출신인 한 교수는 "김중배 국장을 해임할 때 김명예회장이 편집국을 얕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당시 편집국 기자들은 물론 노조까지도 침묵했기 때문이다.


이후 김명예회장은 김중배 사장 발탁과 같은 파격을 시도하는 대신 보수적인 틀 안에서 독주하기 시작했다. 신문 제작의 핵심이라고 할 국장-주필-심의실장이 갖는 고유 역할을 무시하고 한 사람에게 권한을 집중시키고 자신이 그 사람을 직접 관리했다.


여당 대변인을 지낸 한 정치권 인사는 김명예회장이 편집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기사청탁을 할 경우, 다른 신문은 편집국 간부를 통해야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김명예회장한테만 이야기하면 바로 되었다"라고 말했다.


김명예회장은 기자를 해고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동아일보사가 1998년 IMF를 맞아 아무런 예고 없이 기자 24명을 비롯해 전사원의 10%를 해고하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쓰레기도 이렇게 버리지 않는다'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중앙과 조선이 감봉을 통해 해고를 최소화하려 한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김명예회장이 신문사의 재산인 기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 때의 무리한 감원은 지금까지 신문 제작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명예회장이 기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감정은 그가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했을 때 방문 기사를 '김병관 기자' 이름으로 내보낸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또 1997년 1월1일자 〈동아일보〉에 자신이 직접 '국민통합 의식혁명에 나서자'라는 연두 제언을 썼으며, 이 칼럼을 들고 당시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자신은 기자를 못했지만 그는 아들 김재호씨를 주변의 우려를 일축하고 1995년 8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시켰다. '사주 일가는 기자를 하지 않는다'는 가문의 불문율을 깨뜨린 것이다.


아들을 입사시킨 김병관 명예회장은 그의 아버지와 달리 자신의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인 김상만 전 회장이 신문이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의 것이라고 생각해 문화재단을 세우고 출연한 동아일보사 주식을 1994년부터 허위 계약서를 만드는 방식으로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다.


〈동아일보〉를 키우기보다는 선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김명예회장에 대해 회사 관계자들은 애증이 교차하는 반응을 보인다. '사람은 좋은데 안됐다. 짠하다'라는 동정론도 있고, '무능을 통감하고 물러나야 한다'라는 퇴진론도 나온다. 동아투위 출신 한 교수는 "사주가 경영과 도덕성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중견 기자들이 합리적으로 총의를 이끌어내 〈동아일보〉가 거듭날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충고했다. 세무 조사 정국에서 아내까지 잃은 김병관 명예회장은 누구보다도 큰 시련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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