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밀어붙이기' 이인제의 대도박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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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구파 '후보 조기 가시화론' 업고 DJ 압박 초강수…
소장 개혁파 등 '조기 당·정 쇄신론' 역공 거세, 대혼란 예고
당초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는 여권이 10·25 재·보선 참패 수렁에서 벗어날 탈출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교동 구파와 이인제 진영이 내세운 '조기 가시화론'과, 소장파와 개혁 주자 진영의 '조기 당·정 쇄신론'이 충돌하면서 여권은 도리어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민주당이 10·25 재·보선에서 참패한 다음날 일이다. 민주당에 과연 솟아날 구멍이 있느냐고 묻고 다니던 기자에게 이인제 최고위원의 한 핵심 측근이 이렇게 귀띔했다. "사실 한광옥 대표가 방금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와 당·정 개편에 대한 보고를 할 텐데, 공식 브리핑이 있을 때까지 보안을 지켜달라."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후 전용학 대변인이 한대표가 대통령을 면담한 사실과 함께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요점은 재·보선 참패에서 드러난 민심 이반을 수습하기 위해 연말에 대대적으로 당·정을 개편하고, 전당대회 개최 시기 등 정치 일정에 관한 논의를 연내에 끝낸다는 것이었다. 전대변인이 논의 시작 시점을 '정기국회 후'라고 덧붙였지만, 이미 대통령이 후보 조기 가시화의 물꼬를 튼 것으로 해석되었다. 다음날 도하 언론이 '여권 후보 조기 가시화'를 대서 특필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다음날 청와대가 당의 발표가 잘못되었다며 '후보 조기 가시화론'에 급제동을 걸었다. 오홍근 대변인이 "차기 대선 후보 선출 시기 등 내년도 정치 일정과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이 지시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김대통령과 한대표는 배석자 없이 40분간 독대했기 때문에,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는 DJ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후보 조기 가시화는 대통령의 뜻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한광옥 대표가 전당대회 시기를 논의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자 대통령이 "당의 건의를 검토해 보겠다"라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청와대 고위 인사 역시 "한대표가 건의만 하고 대답은 못 들었는데 마치 대통령의 지침을 받은 것처럼 발표했다. 대통령은 이번 재·보선 결과가 대단히 심각하다고 보고 훨씬 전략적인 고려를 하고 있는데, 한대표가 대통령의 의중을 잘못 읽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다만 연말 당·정 개편에 대해서는 DJ가 당초 연말에 당·정을 개편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대표와 이견이 없었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책임 회피용이냐, 이인제 굳히기 음모냐




청와대가 당 발표를 번복하고 나서자 한대표는 주춤했다. 그는 10월28일 밤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 "전당대회 개최 시기를 논의해야 한다고 했을 뿐인데 이것이 조기 선출론으로 확대 해석됐다"라고 해명했다. 이에 앞서 이종걸 대표 비서실장에게는 "기자들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전용학 대변인이 너무 나간 것 같다고 얘기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모든 책임은 이인제 위원과 가까운 전대변인의 '오버'로 돌아갔다.


하지만 대변인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재·보선 참패 직후 동교동 구파와 친 이인제 의원들이 전개한 '후보 조기 가시화' 작전이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 일단 '공정 경선'을 표방했던 당 대표가 후보 선출 시기를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한대표가 대통령을 면담한 직후 동교동 구파(동구파)와 중도개혁포럼(중개포)이 일제히 후보 조기 가시화에 찬성하고 나섰다.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핵심 측근인 이훈평 의원과 한광옥 계보인 박양수 의원은 내년 3∼4월께가 적당하다고 아예 전당대회 시기를 못박았다. 당내 최대 계보를 자랑하는 중개포 역시 10월28일 조찬 모임을 갖고 후보 조기 가시화 쪽으로 무게를 실었다.


권노갑 전 위원이 좌장인 동구파와 정균환 총재특보단장이 이끄는 중개포, 그리고 한광옥 대표는 여권의 정치 지형상 한묶음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지금까지 후보 조기 가시화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터였다.


청와대가 반박함으로써 후보 조기 가시화가 DJ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권 내부에는 커다란 의문이 생겼다. 누구보다 김심(金心)을 잘 읽는다는 권노갑-한광옥 라인이 왜 후보 조기 가시화론에 불을 지피고 나섰느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정가에는 순수론과 음모론이 엇갈렸다. 순수론은 '성공한 대통령 만들기'와 '정권 재창출'을 위한, 그야말로 순수한 충정에서 후보 조기 선출을 주장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동교동계 한 의원은 "지금까지 동구파는 대통령의 레임 덕과 당 분열을 우려해 후보 조기 가시화에 반대했지만, 이번 재·보선 참패 이후 내부 토의를 거쳐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말했다. 후보 조기 가시화만이 대통령과 당이 살 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순수론보다는 권노갑-한광옥 라인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후보 조기 가시화를 추진했다는 음모론이 더 우세하다. 이 음모론은 다시 둘로 나뉜다.


우선 재·보선 참패에 대한 책임 회피용이라는 시각이다. 한 초선 의원은 "한광옥 대표를 비롯한 동구파가 자신들에게 선거 패배 책임이 돌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선수 친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한 소장파 의원은 한대표가 연말 당·정 개편을 건의한 점을 '책임론 회피'의 핵심 근거로 꼽았다. "당 지도부가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표가 사의를 표명했는데 대통령이 연말 개편을 제시했으면 모를까, 대표가 먼저 '연말' 어쩌고 한 것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비난이다. 재·보선에서 참패한 다음날 민주당에서는 대표·총장·총무는 빼고 정세균 기조위원장·신계륜 조직위원장·전용학 대변인만 사표를 냈다. 오죽했으면 출입 기자들 사이에서 "민주당 출입하는 동안 특종을 놓치면 반장(최고참 기자) 대신 말진(후배 기자)이 시말서 쓰기로 하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책임 회피용과 더불어 거론되는 또 한 가지 음모론적 시각은 바로 '특정 후보 지원론'이다. 요컨대 권노갑 전 최고위원을 필두로 한 동구파가 당내 특정 후보를 밀어주고 그 대가로 사후 보장을 받으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여기에서 특정 후보란 조기 전당대회를 치를 경우 가장 유리한 것으로 알려진 이인제 최고위원을 가리킨다.


"동구파와 이인제가 짜고 치는 고스톱"




여권의 한 선거 전략가는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 동구파와 이인제 진영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의심했다. 후보가 탄생하는 순간 DJ는 허수아비가 된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동구파가 갑자기 후보 조기 선출 쪽으로 선회한 데는 뭔가 딴 뜻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이인제 위원의 본선 경쟁력을 조목조목 따지며 동구파를 겨냥했다. 이인제 위원이 여권 후보가 될 경우 본선 구도가 서부연합(호남+충청+수도권) 대 동부연합(영남+강원)이 될 텐데, 이위원은 충청표 흡인력은 낮고 영남표 원심력은 큰 데다, 수도권 바람몰이도 쉽지 않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동구파가 이인제 후보 만들기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정권 재창출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무리 그래도 동구파가 김심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에 한 여권 인사는 이렇게 답했다. "김심은 어차피 중립을 표방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인데, 이를 아는 동구파가 이 기회에 확실히 '자기 장사'를 하는 게 낫다고 계산했을 법하다. 동구파 처지에서는 그런 선택이 김심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김근태·한화갑 위원 등 조기 가시화 반대론자들이 권-한 라인의 조기 가시화론에 대해 특정인과 특정 정파를 위한 것이라며 경계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런 특정 후보 지원론에 대해 당사자들은 물론 말도 안되는 음해라며 펄쩍 뛴다. 청와대의 진화 의지가 전달된 후에는 동교동계 전체가 조기 가시화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의원 개개인의 사견이었을 뿐이라고 적극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이인제 위원이 〈중앙일보〉(10월29일자) 인터뷰에서 후보 조기 가시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오면서 이런 음모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위원은 인터뷰에서 '내년 지방 선거는 대선 전초전이기 때문에 김대통령과 여권의 새 후보 중 누구의 깃발로 선거를 치를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알 일'이라며,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에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민주당의 차기 후보가 김대통령과 차별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당내 경선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라는 등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도로 김대통령을 압박했다. 이를 놓고 정가에서는 동구파가 주도하던 후보 조기 가시화 추진이 대통령의 제동에 걸려 주춤하자 이위원이 직접 승부수를 띄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드디어 '이인제의 대도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위원이 초강수를 던지자 여권 내부는 본격적으로 권력 갈등에 돌입하는 양상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이른바 개혁 주자 진영과 소장파 사이에서 '선 당·정 쇄신, 후 후보 선출'로 맞불을 놓을 태세이기 때문이다. 초선 의원 모임인 '새벽 21' 소속 김성호 의원은 "후보 조기 가시화에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획기적인 당·정 쇄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데는 개혁파의 의견이 일치한다. 당의 체질 개선 없이 후보를 뽑으면 대통령도 후보도 당도 다 망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정치모임 소속 천정배 의원은 민주개혁연대론을 내세웠다. 후보 선출은 잠시 접어두고 김근태·노무현·한화갑 같은 개혁 주자들이 힘을 합쳐 당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당이 동구파의 의도대로 굴러가는 것을 더 두고 보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초·재선 그룹은 다각도로 의견을 모아 조만간 '행동 여부'를 결정할 작정이다. 이번에는 중도파에 속하는 당내 인사들까지 당·정 쇄신 요구에 동참할 태세여서 자칫 지난 5월의 정풍 파동을 넘어선 내분 사태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


당초 후보 조기 가시화론은 여권이 재·보선 참패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구파와 이인제 진영의 '조기 가시화' 대 소장파와 개혁주자 진영의 '조기 당·정 쇄신론'이 충돌하면서 여권은 도리어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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