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최후 승부 '총재 사퇴'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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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사퇴로 '성공한 대통령 + 정권 재창출' 최후의 화살 날려
비장의 카드 너무 일찍 꺼내 성패 '예측 불허'
김대중 대통령이 당 총재 직을 사퇴하자 민주당은 충격과 허탈감에 빠졌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던 때와 흡사한 광경이다. DJ의 총재직 사퇴는 민주당 내분을 일거에 잠재우며 대선을 앞둔 정국 전반을 뒤흔들었다. DJ는 왜 총재 직을 내놓았을까. '사면초가'에 빠진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씨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민주당 힘겨루기의 두 주역인 이인제 · 한화갑 두 상임고문의 생각은 무엇인가.




11월8일 민주당사 4층 당무회의장. 심재권 민주당 총재비서실장이 DJ의 민주당 총재직 사퇴 메시지를 읽는 동안 회의장 안팎에는 허탈한 침묵이 가득했다. 거의 모든 당무위원이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정균환 의원과 설 훈 의원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1992년 12월19일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DJ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하던 상황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DJ 총재직 사퇴는 비등점을 향해 치닫던 민주당 내분을 일거에 잠재우며 민주당은 물론 대선을 앞둔 정국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안개 속에 빠진 정치권에는 온갖 질문이 속출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DJ의 속마음에 모아졌다. DJ는 왜 이런 초강수를 두었을까, 실제로 민주당에서 손을 뗀 것인가, 총재직 사퇴 이후 그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닌가 등등.


DJ는 왜 총재 직을 사퇴했을까? 우선 자포자기설이 있다.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권 재창출 목표를 포기했다는 해석이다. 현재의 민심 이반 정도나 민주당의 난맥상을 감안할 때 정권 재창출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비웠다는 것이다. 남은 임기를 국정 운영에 전념하면서 야당과 관계를 개선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이 DJ의 현재 심정이라는 설명도 곁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해석에 동조하는 이는 많지 않다. 우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대통령 임기가 1년 4개월이나 남은 상황에서 DJ가 정치에서 손을 떼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가의 상식이다. 대통령 선거가 1년 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집권 여당이 정권 재창출을 포기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DJ의 정치 역정을 볼 때 그가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단 DJ가 총재직 사퇴라는 초강수를 빼어 든 직접적인 이유는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던 민주당 내분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당내 분란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기에 이르자 대통령 자신이 직접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 버린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재·보궐 선거 패배에서 나타난 민심의 목소리나 당내 쇄신파의 요구 모두 DJ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대한 DJ의 불신도 사퇴 카드를 빼어드는 데 한몫 했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쇄신파와 일부 대선 주자까지 대통령을 압박하는가 하면, 당의 중심을 잡아야 할 동교동계마저 권력 다툼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면서 DJ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라고 전했다. 특히 한화갑 의원이 쇄신파에 동조하고 동교동 구파와 힘겨루기를 벌임으로써 민주당의 기둥인 동교동계가 분열할 조짐이 본격화한 것에 DJ가 크게 실망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DJ의 특기 '신당으로 위기 돌파' 재현될까




당 내분 수습이라는 면에서 보면 DJ의 총재직 사퇴 카드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당내 분란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쇄신파의 경우 표적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 문제 제기 집단에서 벗어나 당 홀로서기에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서게 되었다. 힘겨루기에 돌입한 동교동계에도 무거운 경고 메시지가 전달된 셈이다. 동교동계로부터 홀로서기를 외치던 한화갑 의원도 동교동의 단합을 주장하고 나서는 등 '개전의 정'을 보이고 있다. 서로에 대한 불만과 비난으로 혼란스럽던 민주당 내부는 DJ가 총재 직을 사퇴한 이후 말을 조심하고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러나 DJ가 총재직 사퇴라는 회심의 카드를 단지 당 내분 수습용으로만 내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민주당 내분을 잠재우는 동시에 DJ 대 반(反)DJ 구도로 고착되어 있는 정국 구도를 새로운 질서로 변화시키기 위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DJ는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정당을 9개나 거쳐 왔고, 그 중에서 자신이 직접 당을 만든 것도 여섯 차례나 된다"라며 DJ식 정치 문법에 주목했다. 선거를 앞두고 기존 정당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정당을 구상하는 것은 DJ의 전통적인 정국 돌파 방식이라는 것이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이 이에 해당한다. 당시 정계를 은퇴한 상황이던 DJ는 이기택 통합민주당 총재와의 갈등 때문에 민주당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권 교체 때까지 밀어붙였다.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호남당 이미지가 강한 국민회의 간판을 내리고 새천년민주당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DJ의 이번 총재직 사퇴 역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성공한 대통령과 정권 재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국 구도가 필요했는데, 총재직 사퇴가 그 신호탄이 되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DJ가 총재 직을 사퇴한 이후 정국 구도는 DJ 대 반DJ 구도에서 새로운 질서를 향해 꿈틀대고 있다. 그동안 반DJ 정서를 자양분 삼아 세를 키우던 한나라당은 DJ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새로운 정계 개편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DJP 공조 파기 이후 DJ와 손잡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던 JP는 대통령과 못 만날 이유가 없다고 자세를 틀었고, 사사건건 반DJ의 선봉에 섰던 YS 역시 "상황을 좀더 지켜 보자"라며 말을 아꼈다. DJ 당적 이탈과 비(非)DJ-반이회창 통합 신당을 주장하던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이제 DJ가 한 발짝 물러섰으니 반이회창 세력을 규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겠다"라며 의욕을 보였다.




DJ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국 구도를 새롭게 짜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권의 한 인사는 "원래 DJ는 중도개혁포럼(중개포)을 통해 민주당의 중심을 잡은 후에 새로운 대선 구도를 짜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중개포를 통해 동교동계 내부의 권력 다툼과 대선 주자들의 세몰이를 통제할 당의 구심력을 확보한 후 적절한 시점에 총재 직을 사퇴해 DJ 대 반DJ 구도를 대체할 새로운 정국 구도를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DJ의 대선 주자 문호 개방 발언도 이러한 구상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재·보궐 선거 참패 후 민주당에서 후보 조기 가시화 주장이 고개를 들 때 동교동계 이훈평 의원은 "이제 DJ를 당에서 놓아주고 당도 반DJ 정서에서 풀려날 필요가 있다"라며 총재직 사퇴를 암시한 적이 있다. 그러자 청와대가 이의원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총재직 사퇴 카드야말로 DJ가 적절한 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정국 돌파 카드인데 미리 김을 빼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DJ가 총재직 사퇴 카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결정은 원래 구상과 달리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10·25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당 내분이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일찍 카드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개포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상태여서 당의 중심을 잡기에는 역부족이다. DJ 총재직 사퇴 직후 정균환 사무총장·이해찬 비상기구 위원장·김민석 비상기구 간사 인선 안이 당내에 나돌자 쇄신파 의원들이 중개포가 당을 장악하려는 것 아니냐며 반발해 한대표가 해명하고 나선 것도 중개포의 설익은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런 점에서, DJ의 총재직 사퇴 카드가 정국에 새로운 물꼬를 튼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DJ의 정국 장악력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물길 위에 던져진 민주당이라는 배가 아직은 불안하고 DJ는 이제 그 배의 선장이 아니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모든 것을 백지 위에서 다시 그려야 하고 민주당이 자생력을 가지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전망했다.


민주당이 당면한 과제는 당의 중심을 새로 세우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에는 두 가지 전선이 있다. 당장은 봉합 움직임이 있지만, 동교동계라는 최대 세력을 둘러싼 권노갑-한화갑 양자 사이의 주도권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황 변화로 인해 자생력을 키워 갈 수밖에 없는 대선 주자들의 각개 약진도 치열해지고 있다. 쇄신파 역시 이러한 힘겨루기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내분 격화하면 DJ 꿈 물거품


만일 민주당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조기에 구심력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면 정계 개편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DJ가 총재 직을 사퇴한 만큼 그동안 민주당을 옥죄던 반DJ 정서와 호남 정당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비DJ-반이회창 세력을 망라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민국당의 김윤환 대표는 이러한 통합 신당을 내년 3월에 결성하자고 일찌감치 주장해 왔다. 최근 들어 YS와 JP 역시 반이회창 노선을 점차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도 DJ가 민주당에서 손을 떼면 새로운 정계 개편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한나라당 개혁파의 한 의원은 "민주당이 호남 정당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한나라당을 포함한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면서 정계 개편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물론 민주당의 정계 개편 시도는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 대선 주자 등 내부로부터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한화갑 의원은 후보 영입은 없다며 여권의 대선 구도가 변화할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인사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들도 현재의 민주당 틀보다는 DJ 색채가 탈색된 신당에서 후보로 나서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당권과 대권을 둘러싼 힘겨루기에 급속하게 빨려든다면 이러한 정계 개편 가능성은 무망하다. 현재 대선 예비주자들은 대부분 후보 선출 후에 후보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대선 후보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나라당의 일부 세력을 끌어들이거나 YS·JP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강하다.


사람도 문제다. 새로운 구도를 짠다면 한광옥 대표와 권노갑·박지원 두 실세가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한대표는 당을 추스르는 것 이상의 여력이 없는 상태다. 권·박 두 사람도 이번 민주당 쇄신 파동을 거치면서 적지 않게 다친 상태여서 운신할 폭이 좁으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DJ는 지금 자신의 40여 년 정치 인생을 마무리할 시점을 맞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안고 있는 숙제는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레임 덕 현상은 시시각각 그를 죄고 있고, 끝까지 자신의 손발이 되겠다던 정치적 자식들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상속 다툼에 뛰어들었다.


준비는 덜 되었지만 DJ는 마지막 화살을 쏘아 버렸다. 3전4기한 승부사답게 '성공한 대통령과 정권 재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거꾸로 통제 불능의 레임 덕 상황에 급속히 빠져들게 될 것인가. 사람들의 눈길은 그 화살 끝을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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