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권력' 국정원, '삼중 게이트'에 갇히다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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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준 · 진승현 사건 이어 경제단 비리 개입 '일파만파'…
검찰 '바람막이 수사'도 의혹 증폭 한몫
국정원 간부들이 지난해부터 꼬리를 물던 벤처 기업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쯤으로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국정원 게이트가 사건 발생후 1년이 지난 정권 말에 불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국정원은 왜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개입했을까? 물음표가 꼬리를 무는 국정원 게이트를 해부한다.


11월17일 오후 1시 사법연수원 1층 대강당에서 김은성 국정원 전 차장의 딸 결혼식이 열렸다. 약간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반가운 얼굴로 하객을 맞던 김은성씨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신 건 원장이 막 식장 입구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서먹한 악수를 나누었다. 사진기자들이 이 장면을 잡으려고 몰려들었지만 경호원들의 방해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얼마 전만 해도 내곡동 청사에서 국정를 논하던 사이였지만 김씨는 여러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사표를 냈다. 첫딸 결혼식이라는 경사를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국정원 고위 간부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흘러간 옛노래쯤으로 취급되던 정현준·진승현 게이트가 정국의 태풍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정현준 게이트는 2심이 끝나고 대법원 판결만 남기고 있다. 흘러간 노래가 다시 떠오른 뒤에는 흥행사가 있다는 음모론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연 권력형 비리의 결정판으로 떠오른 국정원 게이트의 진실은 무엇인가.


김은성 · 김재환의 물고 물린 관계




국정원 게이트의 핵심 인물은 국내 정치·경제·사회·언론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을 총괄하는 국정원 김은성 2차장이다. 국정원 2차장은 1·3 차장과 함께 원장을 보필해 대통령의 통치를 보좌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김차장은 지난해 9월 추석을 전후해 정현준 게이트의 주역이던 이경자씨로부터 천만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지난해 친구인 MCI코리아 김재환 회장과 함께 열린금고 불법대출 사건으로 수배된 진승현씨 구명운동에 나섰다가 둘 사이가 틀어지자 폭력을 동원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이런 의혹에 대해 김차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그는 결국 11월14일 사표를 냈다. 김차장뿐 아니라 국정원 경제단 직원도 게이트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김재환씨는 지난해 서울지검에서 국정원 정성홍 경제과장에게 4천만원을 빌려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소환을 앞두고 있는 정과장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미 국정원 김형윤 전 경제단장이 이경자 동방금고 부회장으로부터 5천5백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터라 국정원 경제단이 권력형 비리의 주역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 국정원 경제단이 정권 내내 구설에 오를까. 경제단에는 돈이 되는 고급 정보가 넘치기 때문이다. 한 경제단 관계자는 정보가 어떻게 돈이 되는지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올 초에 국정원 실세와 가까운 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울지법에 화의를 신청한 기업 명단을 뽑아 달라는 것이었다. 부도가 났지만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이 대개 화의를 신청한다. 돈이 급한 알짜 기업을 이런 식으로 헐값에 인수할 수 있다. 그래서 부자가 된 대표적 인물이 이용호다."


돈 되는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국정원 경제단은 정치단과 함께 '꽃보직'으로 통한다. 학원·노동·언론 분야와 달리 경제단은 아직까지 정보원으로부터 대접받는 몇 안되는 부서 가운데 하나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정보도 넘치고 대접까지 받으니 일할 맛이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 좋은 경제단에는 공교롭게도 호남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김형윤 전 단장(광주상고)이나 정성홍 과장(광주고)이 대표적이다. 광주지부에서 정보과장을 하던 김씨는 정권이 바뀌자 서울본부 경제과장으로 영전했고, 2년 만에 경제단장으로 승진했다. 과장이 단장으로 승진하는 데 보통 4∼5년 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파격이었다. 정과장은 이종찬 원장 시절 개인 비리 때문에 대기 발령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천용택 원장 취임 이후 경제과장으로 발탁되었다. 두 사람은 김차장과 긴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정과장이 김차장과 가까웠다. 국정원이 이들의 비리 사실을 알고도 경고 등 가벼운 징계를 내린 것이 김차장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정원 내외부에서 김차장이 경제단의 두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맺은 이유에 대해 억측이 분분하다. 한 관계자는 김차장이 IMF 전에 친형 보증을 잘못 서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곤궁해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기억했다. 지난해 6월 행자부가 공고한 공직자 재산 공개 자료에도 김차장 부부는 전세에 살고 있으며 부부가 약 1억원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김차장은 자연히 이재에 관심을 가졌고 경제단 사람을 가까이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주변의 해석이다. 그렇지만 너무 깊숙이 개입했던 것일까. 김차장은 그의 부하이자 친구였던 김재환씨를 문제 기업에 파견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다.


국정원 게이트가 드러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진승현씨 구명 로비의 핵심인 김재환씨와 김은성 차장의 갈등이다. 두 사람은 1945년생으로 나이가 같지만 김차장이 입사가 빠르다. 김차장은 과거 김씨를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곧 친구처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믿었기 때문에 김차장은 김재환씨를 진승현씨 구명 로비를 위한 자신의 분신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김씨와 함께 진승현씨 구명 로비 활동을 했던 김 아무개씨의 증언이다. "김재환씨나 김차장 모두 진승현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변호사들이 한스종금을 싸게 인수한 것은 신종 금융기법이지 범죄가 아니라고 전화 변론한 게 주효했다. 그런데 갑자기 금감원에서 열린금고 사건이 터져버리고 언론에 의해 진씨 사건이 정현준 비리와 같은 게이트로 보도되자 진씨를 구속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쉽게 생각했던 일이 어렵게 꼬였고 거기다 김재환씨는 지난해 11월 진씨가 로비를 위해 건넨 12억5천만원 가운데 3억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까지 되었다. 같이 일했던 김 아무개씨에 따르면, 김재환씨는 검찰에 출두해서 간단한 조사만 받으면 된다는 말을 김차장에게 듣고 그대로 따랐다가 구속되었다. 여기서 김씨는 김차장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김씨는 교회 장로여서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라고 한다. 올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김씨는 이런 억울함을 국정원 전 직원들에게 호소했는데, 이를 말리던 김차장 부하들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다 김씨는 진씨의 돈을 뿌린 로비리스트, 이른바 김재환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이 국정원과 검찰 주변에 소문으로 떠돌았다. 한마디로 국정원 게이트는 터질 날만 기다리고 있던 시한 폭탄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국정원이 3대 게이트에서 화려한 주연 배우 노릇을 할 수 있던 것은 검찰이 바람막이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국정원 간부에 대한 진술을 확보하고도 수사를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들 게이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따라서 국정원이 '빅3 게이트'에 개입했고 검찰이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특히 비리의 주역들이 국내 경제 정보를 총괄하며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정원 경제단 라인이어서 비난이 더 거세다. 한나라당은 국정원 경제단이 권력형 비리의 핵심이라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청와대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과거 정권에서도 정치자금을 안기부가 관리했다. 우리는 국정원 차장이 개입한 사건을 이런 관점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력 실세 제거 작전인가, 전북·전남 대결인가


국정원이 여권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 까닭은, 김은성 차장이 벤처 기업이 낀 게이트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관여한 흔적이 있고, 개입한 정도가 단순한 재테크 차원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차장은 김재환씨와 함께 대검 간부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고 부하 직원들을 동원해 검찰 동향을 알아 보았다. 김재환씨 소개로 진씨와 혼담이 오간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당시 검찰이나 국정원에서 이 말을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최근에는 김차장이 김재환씨를 한국디지털라인 정현준 사장의 비밀 사무실인 알푸투루 부회장으로 앉혔다고 정현준씨가 주장했다. 만약 정씨 말이 사실이라면 정보기관의 좌장 격인 김차장이 단순히 개인 치부를 위해 이와 같은 무리수를 두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연히 민주당에서조차 김차장이 권력 실세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김차장이 정치권에 고급 정보를 제공하면서 정치자금 관리를 위해 기업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가 이들이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구명 로비를 했다는 분석이다.


이 잊힌 사건을 다시 부각한 일등공신은 언론이다.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것은 〈한국일보〉였지만 정치 쟁점으로 몰고 간 것은 〈동아일보〉와 〈내일신문〉이다.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언론 보도가 여권 핵심 인사가 기획한 인사 개혁 시나리오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집권당에 환멸을 느끼는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 호남 편중 인사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정권 실세와 사정기관 내부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했다는 것이다. 또 이번 재·보선에서 민주당에 참담한 패배를 안긴 각종 게이트에 대한 의혹도 이 기회에 씻는다는 전략이다.


현재 동교동 신주류 일각에서 이 일을 준비하고 있으며, 제거 목표는 권력 실세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여권 인사는 "김홍일 의원이 내년 초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럴듯한 시나리오지만 정권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런 모험을 하겠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또 안팎으로 어수선한 민주당과 청와대에서 누가 그런 복잡한 아이디어를 집행하겠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 설득력을 얻는 추리는 국정원 실세 라인을 장악하고 있는 전북 인사들이 전남 세력을 밀어내기 위해서 김재환씨 사건을 언론에 흘렸다는 것이다. 여권 주변에서는 이 추리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권력형 비리 의혹을 털고 지나가면 내년 대선 구도에서 여당이 한나라당에 밀릴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재 정권 재창출 프로그램이 준비 중이거나 진행 중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결국 국정원 게이트 수사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권력 실세들의 수싸움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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