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렁해진 '아저씨와 조카님들'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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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 홍업 형제 권노갑과 앙금 깊어져…한화갑과는 '더 가까이'
양갑 전쟁을 지켜 보면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바로 대통령의 두 아들인 홍일·홍업 씨의 처세다. 정가에서 H1과 H2로 불리는 두 사람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한화갑 고문을 지지하고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홍일 의원은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에서 한고문을 1등으로 당선시킨 막후 공신이다. 당시 그는 자기가 명예총재로 있는 연청 회원들에게 한 표는 반드시 한화갑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김의원은 또 지난 10월28일 새 연청 회장에 한화갑계로 분류되는 배기선 의원을 앉혔다. 그날 행사장에서 김의원은 당초 대선 주자는 인사말을 못하도록 한 내부 원칙을 깨고 "나 대신 내가 존경하는 한화갑 선배님께 연설할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해 장내를 놀라게 했다.


김의원이 한고문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만이 아니다. 올해 초 '호남 후보 불가론'을 놓고 한고문과 동교동 구파 사이에 신경전이 한창이었을 때의 일이다. 몇몇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호남 후보 불가론에 대해 "그럼 나도 안된다는 얘기네?"라고 농을 던진 후 "특정 지역 후보는 안 된다는 식의 논리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한고문을 옹호했다.


공인인 김의원과 달리 차남 홍업씨의 한화갑 지원은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H1보다 H2가 더 열성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홍업씨는 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한고문 진영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정보에 굶주려 있는 한고문 진영에서 보자면 김대통령의 의중을 알려주고 반대로 한고문측 사정을 대통령에게 대변해 주는 홍업씨의 존재가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그런 홍업씨의 역할이 밖으로 한 자락 드러난 예가 바로 '방탄차 선물'이다. 홍업씨는 최근 1997년 대선 때 DJ가 타고 다녔던 방탄용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한고문에게 선물했다. 이 차는 DJ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홍업씨에게 맡겼던 것으로, 정가에서는 DJ의 동의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다. 한고문은 요즘 이 차를 타고 다닌다.


이에 반해 두 아들과 권노갑 전 고문의 사이는 매우 껄끄럽다. 특히 쇄신 파동과 각종 '게이트'를 겪으면서 여권 내부에는 이들을 둘러싼 권력 암투설까지 나돈다.




10·25 재·보선 직후 권노갑·박지원 퇴진론이 다시 한번 불거지자 권씨측에서는 "굳이 선거에 패한 책임을 따진다면 이용호 게이트에 오르내린 김홍일 의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 왜 김의원은 놔두고 가만히 있는 권고문만 공격하느냐"라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교동 구파가 김의원을 걸고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어 김대통령이 총재 직에서 물러나기 이틀 전 권씨의 참모회의에서도 김의원이 쇄신파를 지지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요즘 정가에는 두 아들과 신 건 국정원장 등이 하나가 되어 동교동 구파 라인 제거 작전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무영 경찰청장과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에 이어 신승남 검찰총장이 다음 차례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 때문에 동교동 구파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라고 말했다.


신경이 곤두선 것은 김홍일 의원 쪽도 마찬가지다.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정성홍 전 경제과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홍일 의원이 건달과 어울려 다녔다'고 말한 것을 두고 김의원측은 동교동 구파의 물귀신 작전이라고 본다. 김은성-정성홍 라인은 국정원 내 권씨 인맥으로 유명하다.


김의원은 또 내년 초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나가겠다고 한 것이 '장기 외유설'에 이어 '지역구 이양설'로까지 번지자 진원지를 권씨 진영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의원의 한 측근은 "김의원이 한 신문사 기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지역구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사실무근이다. 김의원은 특정 진영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닌지 불쾌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의원이 지역구 이양설에 민감한 이유는 바로 권씨의 아들 때문. 평소 "나는 평생 비서였지만, 아들은 액터(배우)로 키우고 싶다"라고 했던 권씨는, 자기가 김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듯이 김의원이 자기 아들에게 목포 지역구를 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권씨의 아들은 아버지가 쇄신 대상으로 지목되자 가족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권씨에게 반격하라고 부추긴 것으로 알려진다.


H1의 미국행 발표는 경고 메시지?


그렇다면 '아저씨' '조카님' 하던 권씨와 홍일·홍업 형제가 이렇게까지 틀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두 아들과 가까운 한 인사는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때부터라고 단언했다. "당시 당헌·당규에는 경선에 참여한 최고위원 중에서 대표최고위원을 지명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대로라면 경선 1등이 대표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권고문측이 한고문을 견제하기 위해 이인제 1등 만들기에 나섰다. 만약 이인제 고문이 1등으로 당선되어 대표까지 맡았다면 그때부터 레임 덕이 시작될 것은 자명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권고문이 공공연하게 이인제 지지에 나서자 두 아들은 권고문이 자기 욕심을 챙기기 시작했다며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홍일 의원이 '동교동 출신이 1등을 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한고문을 지지하고 나선 데에는 이런 내막이 있다. 결국 이 규정은 한고문의 제안에 따라 삭제되었고, 대통령이 지명직 최고위원 가운데 대표를 지명하는 길을 열었다.


권씨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두 아들에게 최근 권씨가 보인 반발은 아버지에 대한 항명으로 비쳤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대통령과 박지원 수석이 물러난 다음날에도 권고문은 쇄신파를 공격하고 자신을 변호하는 기자회견을 고집했다. 청와대의 말발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대통령 가족이 격분했다"라고 전했다. 결국 권씨의 기자회견은 박 전 수석이 사흘 연속 권씨를 찾아가 "이러면 다 죽는다"라고 만류한 끝에 취소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박수석이 큰일을 했다'며 그의 퇴진 결정을 칭찬하는 얘기가 여권 핵심부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 이후다.


김홍일 의원과 가까운 한 인사는 김의원이 내년 초 미국에 가겠다고 발표한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신병 치료, 속으로는 경선에서 불공정 시비가 생기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지만, 그 밑바닥에는 '권고문도 주변을 정리할 때가 된 것 아니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의원은 이번 미국행을 DJ에게 미리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씨는 거듭 물러날 뜻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오히려 내년에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에 나설 뜻을 밝히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H1·H2의 반 권노갑, 친 한화갑 양상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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