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게이트' 끝은 어디인가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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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활화산' 김은성 게이트 정치권 흔드나/
진승현 로비 리스트 밝혀지면 '대폭발'
젊은 벤처 기업가의 단순 대출 비리로 알려졌던 진승현씨 사건이 정치권을 흔들 뇌관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김은성 국정원 전 차장이 진씨를 위해 전방위 구명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로비 자금을 받은 정치인이 누구인지로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김은성 게이트의 불똥은 정권 실세를 향해 날아갈 것인가.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이 진행되는 진승현 게이트 사건이 점입가경이다. 이미 터진 폭탄이라고 느긋해 하던 민주당이나, 여당 비리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던 한나라당은 침을 삼켜 가며 사건의 추이를 지켜 보고 있다. 총장이 탄핵 소추에 몰렸던 검찰이 과연 폭탄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관심사다.


리바이벌 곡이 원곡에 비해 더 인기몰이를 하는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철 없는 20대 사업가가 저지른 단순 대출 비리로 알려졌던 이 사건이 YS 정권을 흔들었던 한보 사건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물론 규모는 한보와 비교가 안되지만, 거액의 대출 비리가 있었고 그 돈의 일부가 정계에 뿌려졌다는 점이 닮았다. 거기다 권력기관과 핵심 실세가 개입한 흔적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따라서 진승현 사건의 초점은 과연 국정원이 어디까지 개입했으며, 정치인 가운데 누가 진씨의 돈을 받았는지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


이 사건을 다시 부각한 것은 〈한국일보〉였다. 이 신문은 11월 초 김은성 당시 2차장이 부하 직원을 동원해 진승현 구명 로비를 했던 김재환씨를 폭행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실은 김재환씨가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후 전직 국정원 사람을 만나서 억울하다고 말하고 돌아다녀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확인을 해주지 않아 기사화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일보〉가 '세게' 치고 나온 것이다.


"김은성·김재환 심하게 다툰 것은 사실"


당연히 국정원은 심하게 반발했고 김은성씨는 다음날 〈한국일보〉에 10억원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다. 그런데 다음날 〈동아일보〉가 김씨가 이경자 사건과 관련해 천만원을 받은 사실이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으나 검찰이 덮어버렸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각종 게이트에 국정원이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게 되었다. 언론발 국정원 게이트는 여야 정치 공방으로 번졌다. 결국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으로부터 5천5백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김형윤 단장에 이어 김은성 차장과 정성홍 과장이 줄줄이 사표를 썼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실체 없는 사건으로 정권의 핵심 세력인 국정원을 과도하게 흔드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김재환씨가 맞았다는 진술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을 받았다고 보도된 당사자들이 모두 부인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실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이 DJ 정권을 흔들려고 의혹을 부풀리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 인사는 물론 진승현씨 측근 인사들도 올 봄부터 '김재환씨가 심하게 맞아 다리를 전다' '호텔에 끌려가 맞았다'라고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진승현씨 구명 로비를 했던 검찰 출신 김 아무개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심한 마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현장에 있었으며 고성이 오간 것을 들었다고도 말했다. 따라서 폭행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그 모임의 분위기가 험악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20년 지기인 김은성씨와 김재환씨는 왜 다투었을까. 진씨 측근 인사에 따르면, 김재환씨는 "감옥에 간 것이 억울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김은성씨 소개로 MCI코리아 회장 자리에 앉았다가 결국 구속되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김재환씨는 자기가 구속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출두해 가볍게 조사만 받으면 될 줄 알았는데 출두하는 날 바로 구속되었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자기가 김은성씨를 대신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평하고 다니다 김은성씨와 마찰을 빚었으리라는 것이다.


또 다른 추측은, 김재환씨가 수사 과정에서 정치인과 국정원 직원의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에 충돌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누구에게 얼마를 건넸는지 구체적인 내역까지 언급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단순 대출 비리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을 확대한 데 대해 김은성씨가 화를 내다가 실력 행사를 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감정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이 사건은 세상 밖으로 불거졌다. 특히 김은성씨가 중용해 '김차장의 발'이라고 불렸던 정성홍 전 과장이 관련된 사건이 하나둘씩 불거지면서 진승현 사건의 윤곽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김재환씨로부터 4천만원을 빌려 쓴 것으로 알려졌던 정씨가 진승현씨의 정·관계 로비 창구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건이 커지자 국정원만 나오면 맥을 못쓰고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던 검찰은 12월1일 정성홍 국정원 전 경제과장을 구속했다. 진씨로부터 현금 5천만원 등 모두 1억4천6백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였다. 이 돈은 진씨가 자신의 구명 로비를 위해 고용한 MCI코리아 김재환 회장에게 건넨 12억5천만원과는 별개의 돈이었다. 정씨는 그동안 김재환씨로부터 4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해 왔지만 진씨의 진술과 검찰의 보강 수사로 덜미를 잡혔다. 결국 이 사건은 언론이 부풀려서가 아니라,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진 셈이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김은성·정성홍 너무 설쳤다"


정씨가 구속되자 관심은 김은성 전 2차장에게 쏠리고 있다. 정황을 보아 그도 정과장처럼 진씨로부터 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국정원 내부에서는 '김 전 차장과 정 전 과장이 해도 너무 한다'라는 말이 많이 돌았다고 한다. 이들 라인이 벤처 기업에 편의를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챙긴 것은 물론 진승현씨가 구명 로비 자금을 정치권에 전달해 달라고 준 돈마저 일부를 가로챘다는 것이다. 당시 국정원 간부였던 사람도 기자를 만나 비슷한 얘기를 털어놓았다(26쪽 인터뷰 기사 참조).




국정원 관계자들은 국정원이 이 사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김은성 전 차장 쪽에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김은성씨와 그의 사조직이 저지른 일이라고 단언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국정원 게이트가 아니라 김은성 게이트라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정성홍 전 과장이 진승현씨에게서 받은 수표가 김차장 계좌로 들어갔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태도로 볼 때 계좌 추적 결과에 따라서는 김은성씨가 전격 소환될 수도 있다.


김은성, '진승현 구하기' 입체적 로비


김은성씨는 또 검찰을 출입하는 직원에게 천만원을 주고 검찰의 수사 상황을 사적으로 보고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진씨 사건이 터졌을 때, 국정원 직원들이 검찰 수사 상황을 알아보러 돌아다녔다는 설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그만큼 진승현씨를 구해 내려는 로비는 입체적이었다. 국정원 간부를 동원해 검찰·금감원에 압력을 행사하려 했고, 검창총장 출신 변호사를 영입해 검찰을 상대로 전화 변론을 시도했다. 여기에 변호사 선임료가 무려 8억원이나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변호사는 수임계를 내지 않고 변론에 나서 앞으로 문제가 될 전망이다. 변호사 선임에는 진씨의 아버지 진수학씨도 적극적이었다. 검찰총장 출신 ㄱ변호사는 진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한 정치인이 소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물샐 틈 없는 구명 로비 때문에 당시 진씨 측근 가운데 누구도 진씨가 구속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검사는 "평소 연락이 없던 국정원 감찰팀 소속 대학 동기가 진씨 사건을 물어와 황당했다"라고 말했다. 진씨 구명 로비를 했던 김 아무개씨는 "김차장 지시로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직원 5명이 뛰어다녔다"라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한 국정원 직원은 담당 검사에게 협박성 발언을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고 한다. 김은성 전 차장과 정성홍 전 과장이 어느 정도로 검찰을 압박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은성 차장은 진씨가 자신의 사윗감이라며 구속될지 안될지 수사 상황을 신승남 당시 차장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진승현 측근들이 '수뢰 정치인 명단' 보관"


이 사건의 불똥이 현정권의 실세에게까지 튈지는 미지수이다. 현재 김은성씨가 정권 실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대전지부장(2급)이던 그가 국정원에서 대공정책실장을 맡고 국내 모든 정보와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2차장으로 승진하자 국정원 내부에서는 말이 많았다. 든든한 정치 실세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국정원 등 여권 실세들이 벤처 기업 대출 같은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비자금을 챙겼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진승현씨는 총선 전 정치인을 만나 정치 자금을 뿌렸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검찰은 일단 정치인에게 돈을 준 내역을 메모한 명단이 존재한다는 진술을 토대로 이 명단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명단은 돈가방을 나르기 바쁘던 진승현씨가 결국 수배자 신세로 전락하자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 명단은 측근들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차장이 일련의 과정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 수사를 통해 밝히기는 쉽지 않다. 진승현씨와 정성홍씨를 비롯한 피의자 대부분이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 이상 진술하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계는 김은성 차장이 진승현 게이트에 어떻게 개입했느냐 하는 것보다 이 명단의 존재 여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재기가 불가능해진 진씨가 낙심해 입을 열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계 주변에는 진승현이 만난 정치인이 30명, 돈을 받은 인사가 10명에 이른다는 설이 돌고 있다. 실세인 동교동계는 물론 야당 의원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특히 권력 실세인 동교동계에 진씨 자금이 집중적으로 뿌려졌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진승현이 왜 동교동계인 김방림씨에게 돈을 주었는지 주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 사건이 김 전 차장의 사조직이 개입한 개인 비리로 정리되고 있는 데 안도하고 있지만 아직 지켜 보자는 입장이다.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은 동교동계가 정보기관 인사에 무원칙하게 개입해 이런 난맥을 불러왔다고 개탄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이 사건은 야당 주장과 달리 국정원 게이트가 아니라 김은성 게이트라고 본다. 김차장의 배후에 정치권 실세가 있는지 판단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런 흔적이 드러나면 당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털고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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