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이원조’ 될까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물 소동’ 주역 이형택 전무는 누구인가/‘정치자금 조성’ 의혹 집중

1999년 1월7일, 김대중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씨가 전격적으로
예금보험공사(예보) 전무에 임명되자 당시 금융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그는 제2의 이원조이다.”


이원조씨는 1980년 제일은행 상무로 있다가 국보위 위원과 청와대
비서관이 되면서 ‘금융권의 황태자’로 불리며 5공 정권의 실세가 되었던
인물. 두 사람은 성이 같다는 것 외에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민간인이었고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업·서울 은행에 근무하던 이형택씨는 1989년 동화은행 창립
멤버가 되었다. 그가 널리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7년 10월7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의 강삼재 사무총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터뜨린 이른바 ‘DJ 비자금
사건’을 통해서이다. 당시 강의원은 이씨가 3백49개 계좌에 2백95억1천2백75만원의
‘DJ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형택씨 스스로 예보 전무 자리 원했다”


김대통령이 당선된 뒤, 1998년 1월31일부터 2월23일까지 이루어진
대검 중수부의 조사에서 이씨가 관리한 정치자금은 55억원으로 밝혀졌고,
이때부터 이씨는 ‘비자금 관리자’로 통했다. 검찰에 출두한 이씨는
당시 “내 개인 계좌일 뿐,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김대통령을 감쌌다.


김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8년 2월26일 이씨는 동화은행 영업
1본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했으나, 그해 6월 동화은행이 퇴출되자 실직자가
되었다. 실직 상태에서 한때 그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이 대기업은 세무 조사를 대비한 방패막이로 이씨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씨는 실직한 지 6개월 만인 이듬해 1월, 재경부의
‘배려’로 예보 전무가 되어 화려하게 복귀했다. 금융권에서 예보 전무는
요직으로 가는 지름길로 통했다. 통상 정부 부처의 1급 관료가 가던
자리에 이씨가 임명된 것이다.


당시 예보 전무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재경부장관은 이규성씨다.
그는 “은행에서 30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은 점이 인정되었다”라고
이씨를 예보 전무에 임명한 배경을 설명했지만, 동교동계 한 고위 인사는
이씨 본인이 그 자리에 가기를 강력하게 원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씨가 그때 예보에 가지 않았으면 지금 같은 일도 안 생겼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재경부가 이처럼 이씨를 대접한 것은 그가 정치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로부터 남다른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씨는
스스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 되었다.


예보에서 이씨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예보의 한 고위 인사는 “예보
전무는 회사로 치면 부사장, 집안으로 보면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장이 대외 업무에 바쁘기 때문에 전무가 내부 살림을 전반적으로 책임진다”라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예보가 공적자금 투입과 집행을 담당한 핵심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이씨가 어떤 식으로든 ‘돈을 주무르는’ 것과 관련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이희호 여사의 민원을
해결하는 역할도 일부 수행했다는 것이 사정을 아는 여권 인사들의 설명이다.


“이희호 여사 민원 해결 역할도 일부 수행”


의사였던 이희호 여사의 부친 이용기씨는 6남2녀를 두었는데 이형택씨는
한국증권협회장을 지낸 맏아들 이강호씨의 차남이다. 무역업을 하던
이강호씨의 장남 이원택씨도 김대통령을 물심 양면으로 돕는 등 형제가
김대통령과 남다른 관계였다. 김대통령은 야당 시절 이여사의 동생인
영호씨가 살고 있던 이른바 ‘목동 안가’를 자주 찾았는데, 이형택씨도
가끔 이곳에 들렀고, 이여사는 친인척 가운데 이씨를 각별하게 아꼈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형택씨가 실질적으로 보물 발굴
사업을 주도하며 여권의 정치자금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1월25일 장광근 수석 부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단순한 권력 비리 사건이
아니라 ‘정치자금 조성용 기획 사건’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논평을
냈다. “시중에서는 ‘제1 국무총리 이형택’ ‘제2 국무총리 이한동’이라며
총리가 두 사람 있다는 농담까지 회자된다”라며 이씨를 단순한 친인척이
아닌 여권의 상당한 실력자로 보았다.


아직까지 이씨가 여권의 정치자금 조성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없다. 동교동계의 한 고위 인사는 ‘DJ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이씨를 통해 자금을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사건의 얼개만 살펴보아도 그가 주연은
아닐지라도 조연을 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