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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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타’ 맞는 대세론 ‘빌라’와 함께 무너지나
이회창 대세론에 급제동이 걸렸다. 박근혜 의원의 탈당으로 시작된 정국의 격변은 이총재의 지지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정치 환경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최근 열흘 사이에 벌어진 박의원의 탈당과 ‘빌라 타운’ 사건만으로도 이총재는 수백만 표를 까먹었다는 것이 정가의 관측이다.





이뿐인가. 김덕룡 의원의 탈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나라당의 내부 권력 투쟁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정가에는 어느새 ‘이회창 대세론’이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 이총재의 한 측근 의원은 대세론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들이 많은 것 같다며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은 사실을 인정했다. 정가에 ‘집권 야당 총재’라는 신조어를 낳을 정도로 대세를 형성했던 이총재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지난 2월28일 박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정국 상황은 한나라당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씨와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가 구속되는 등 여권 핵심부와 관련한 비리가 연달아 터져 나와 대변인실은 성명을 내기도 바빴다. 심지어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한나라당이 집권당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자연히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강경론이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강경파에 속하는 수도권 출신 한 초선 의원은 정권 교체가 쉬운 것이 아니라며 여권 핵심부가 완전히 백기를 들 때까지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태재단을 해체하라든가, 대통령 일가에 대한 특검 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DJ 너무 몰아세워 부메랑 맞았다”



그러나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와 다른 흐름도 있었다. 대통령 일가에 대한 공격은 반드시 역공을 불러오니 공격을 자제해 김대통령을 중립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한 핵심 당직자는 지난 2월18일 홍준표 의원이 ‘민주당 김홍일 의원을 비롯한 12인에 대해 특검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자 전략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을 망치고 있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일부 의원들도 여권을 너무 자극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핵심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이대로만 가면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강경파의 소리에 묻혀 주목되지 못했다.



결국 한나라당의 무리한 압박 공격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김대통령이 분노한 것이다. 동교동계의 한 핵심 인사는 지난해 말에도 대통령이 한나라당 핵심부에 사람을 보내 정치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도 한나라당의 공격이 계속되는 데에 김대통령이 격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를 멘 것은 동교동 비서그룹의 막내로 통하는 민주당 설 훈 의원. 설의원은 지난 3월5일 “이총재와 아들 정연씨가 가회동의 105평짜리 고급 빌라 두 채에 세를 얻어 살고 있다. 이총재는 정치자금 내역을 공개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설의원의 공격은 박근혜 의원 탈당 이후 뒤숭숭했던 한나라당 내부를 단숨에 흐트러뜨렸다. 당이 이렇게 허술했던가 하는 탄식이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한나라당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사실 설의원이 공개한 빌라 건은 설날 이총재 자택에 천명이 넘는 인파가 몰린 것으로 보도된 직후부터 정치권 주변에 떠돌던 사안이었다. 일부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3층만이 아니라 2층도 외국에 사는 아들 정연씨를 위해 빌려놓고 비워두고 있다. 한 측근이 설 연휴 때 손님맞이를 위해 2층을 쓰자고 건의했다가 이총재 가족으로부터 혼쭐이 났다”라는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여권 핵심부는 이총재의 빌라와 관련한 내용을 이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여권에서는 이 사안을 대선 국면이 본격화한 시기에 이총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히든 카드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예상보다 일찍 공개된 데는 더 이상 한나라당의 공격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여권 핵심부의 판단이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동교동계 한 핵심 인사의 말대로라면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인데 이총재가 지나치게 ‘오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총재측은 사태 초기에 이 사안이 얼마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이총재는 지난 3월7일 충남 청양·홍성 지구당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집 잡을 게 우리 집밖에 없나.” 그러면서 오히려 “김대중 정권은 천민 정치를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이총재의 한 참모는 그런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서민들이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이총재가 전혀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총재, 사실 관계에만 치중”






그러나 이총재의 사위가 4층에 세를 얻어 살고 있다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빌라 타운’ ‘가족 타운’이라는 얘기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총재의 한 참모는 이때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져 묻는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운동장만한 빌라, 이총재의 사위 부부가 월세 9백만원을 내고 산다는 데 서민들이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이총재와 측근들이 정말 문제이다’라며 이총재가 직접 해명하라는 언론의 질타도 이어졌다.



급기야 이총재는 설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지 사흘이 지난 3월8일 오전에야 해명성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총재는 “국민에게 걱정을 끼쳐 송구스럽다”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이 사안이 갖고 있는 파괴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05평이니 114평이니 하지만 조사해 보니 73평 밖에 안된다” “마치 큰 호화 빌라를 여러 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당 총재의 거처는 손님맞이도 해야 해 큰 집을 구하는데 우리 집은 방이 4개뿐이다”라는 등.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는 이총재의 사돈인 최기선씨가 주인으로 되어 있는 종로구 가회동 경남빌라 B동 302호(이총재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실제 주인이 이총재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또 이총재의 먼 친척이 사업상 필요해 전세를 얻어 정연씨가 종종 사용했다는 B동 202호의 전세금을 내준 사람이 사실은 정치인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총재 쪽에서는 1997년 대선에 패한 뒤 돌아갈 집도 없어 사돈이 도와준 것일 뿐이라며 민주당이 근거도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관계에 치중하는 이총재의 인식은 이번 사건을 보는 국민들의 정서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두 아들들의 ‘병역 면제’ 파문이 일었을 때도 이총재는 사실 관계에 매몰된 대응을 했었다. 이 때문인지 ‘빌라 타운’ 사건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는 1997년의 병역 파문 때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나라당 홈페이지에는 ‘아파트값 거품으로 국민 생활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총재의 호화 저택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주고 있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105평짜리 빌라에 사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이총재를 보면서 서민의 고통을 모르는 이총재가 정권을 잡으면 귀족들의 나라가 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2월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거론한 ‘메인스트림(주류) 심판론’과 같은 엘리트주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등 이총재의 정체성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빌라 타운 사건이 증폭된 배경에는 이총재의 ‘비밀주의’도 한몫을 했다. 경직된 시스템과 근거 없는 낙관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이총재에게 가족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총재 또한 ‘가족 문제는 내게 맡겨 달라’는 식으로 공개를 꺼렸다. 주변에서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와 관련한 문제가 터지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한나라당이 이총재의 집안 사정를 잘 몰라 헤맨 경우는 이번말고도 여러 번 있었다. 옷로비 파문이 한참이던 1999년 여름에는 여권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이 고가 옷을 즐겨 입었다며 맹공격했다가 이총재 부인인 한인옥 여사도 라스포사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머쓱해진 적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여권 고위층 자녀들이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가 이총재의 둘째 아들 수연씨가 또 다른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민주당이 공개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유화파가 당내 흐름 주도할 듯



한나라당 한 핵심 당직자는 이회창 대세론이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한나라당이 너무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반DJ 정서에 편승하려는 자세, 6월 지방 선거 이후에야 고비가 닥치리라고 내다본 전략 판단의 실패, 공격에만 치중하면서 내부 점검은 소홀히 한 오만 등이 위기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총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빌라 타운 사건의 파문은 일반적인 예상보다 훨씬 오래갈 수 있다고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예상했다. 1997년의 병역 파문처럼 대선 정국에서 사람들 입에 끈질기게 회자되면서 이총재를 괴롭힐 만한 소재라는 것. 이 전문가는 이총재에 대한 지지층은 YS나 DJ에 대한 지지층과 달리 충성도가 높지 않아 상황에 따라 대세론이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세론에 제동이 걸린 한나라당은 원점에서 모든 것을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앞으로는 윤여준 기획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유화파가 흐름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윤위원장은 “자기 반성 속에서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대세론에 금이 간 이총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몇 가지 사안을 정밀하게 가다듬으며 공개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정권 교체가 얼마나 힘든지를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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