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부활의 날개 있 는가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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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월드컵에서 뿐 아니라 6·13 지방 선거에서도 쏟아졌다. 한나라당은 시장·도지사 16명 중 11명을 당선시켜 69% 당선 점유율을 보였다. 시장·군수·구청장 2백32명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당선자는 1백40명이나 된다(60.3%). 득표율로 따지면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거의 더블 스코어로 이겼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치러진 각종 선거에서 이처럼 1, 2위 정당간 득표 차이가 많이 난 적은 없었다.


그 결과 전국 정당을 지향하던 민주당은 완벽한 ‘호남당’으로 전락했다.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수도권에서까지 참패해 평민당 때보다 도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갈수록 느슨해지는 호남 결속력은 민주당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탈당하고, 경상도 출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해 놓고도 막지 못한 민주당의 참패. 이 때문에 요즘 민주당은 치열한 책임 공방에 휩싸였다. 그 한가운데 노무현 후보가 있다.
민주당이 참패한 원인이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게이트 때문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선거 패배의 핵심 원인이 노무현 후보에게 있다는 주장도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아무리 DJ의 그림자가 넓어도 노후보가 내뿜는 빛이 그 그림자를 걷어낼 만큼 강했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한 중진 의원은 “올해 초 특대위에서 대통령 후보를 지방선거 전에 뽑기로 한 것은 이미 DJ당으로는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선거에 참패했다면 결국 대통령 후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정치권 안팎의 선거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노무현의 문제’는 여러 가지다. 우선 김대중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적절하게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후보는 처음부터 자기 발로 DJ를 밟고 가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대신 그는 당 지도부와 소장파가 DJ와의 고리 끊기에 앞장서기를 희망했다. 이른바 차도지계(借刀之計)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는 소장파의 전폭적 협조를 얻지 못한 데다 청와대와 동교동계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어정쩡하게 끝나고 말았다. 심지어 아들이 구속되는 상황에서 김대통령의 직접 사과마저 끌어내지 못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정치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 그것을 풀어주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노후보는 국민이 DJ 정권의 부패 스캔들에 염증이 나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했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영남 사람들 사이에 ‘노무현을 안 찍는 이유는 대통령 된 다음에 DJ를 감옥 보내지 못할 것 같아서’라는 정서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3김 극복에 실패해 최악의 사태 초래



두 번째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엎어지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한 정치학자는 “YS를 찾아간 것까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공천권을 덥석 넘기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법학자 역시 “박종웅 의원이 누군가? 언론사 세무 조사에 반발해 단식 농성을 한 사람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런 박의원을 언론사 세무 조사를 가장 강하게 두둔했던 노후보가 공천 대상에 올린 것은 상황에 따라 소신을 바꾸는 사람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후보의 YS 방문이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은 이번 6·13 지방 선거 결과 확실히 입증되었다. 노후보가 집중 지원한 한이헌(부산)·김두관(경남) 후보는 형편없는 지지율로 낙선했다. 노후보 고향에서조차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YS 방문은 영남 민심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지역 표심을 잃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호남과 부산·경남을 묶겠다는 노후보의 신민주대연합론이 충청·강원·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소외론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이 민주당 지지층의 이탈로 이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깽판’과 ‘양아치’ 발언 등 노후보의 잦은 말 실수도 민주당 지지층, 특히 지식인들의 이탈을 가속화했다. 노후보측은 이런 ‘화법’을 노무현 스타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서민의 눈높이를 가지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기를 기대하는데, 이런 ‘저질’ 발언은 ‘역시 대통령감이 아니다’라는 확신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된 후 당내 화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경선 이후 그는 이인제·김중권 등 경선 경쟁자들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비주류 중진들에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연 적도 없다. 노후보측은 상대방이 안 만나려고 하는데 굳이 문전박대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인제 전 고문 등을) 찾아갈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당 일각에서 “정치의 기본은 조정과 통합인데 노후보는 이 대목에서 취약성을 보이고 있다”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이렇듯 후보 선출 이후 한달 반 동안의 노무현 행보에 대해서는 칭찬보다 비판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를 두고 노후보가 3김 극복에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요약했다. DJ와 절연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YS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JP와의 연합공천 등에 대해서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것이 모두 3김 극복을 바라는 민심에 정면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6·13 지방 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에서 이제 3김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본 <요미우리 신분>도 선거 다음날 보도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만든 민주당의 참패,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끄는 자민련의 퇴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향력 감소 등 한국을 30년 이상 움직여온 3김 정치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역사적 선거였다’고 해석했다. 그런 마당에 노후보는 오히려 3김에 편승하는 전략을 폈으니 가뜩이나 전세가 불리한 지방 선거전에서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재경선으로 노풍 재현 노려



문제는 노후보 진영이 이런 외부의 지적을 제대로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후보는 ‘책임론’이 불거진 6월17일 당무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참석해 ‘8·8 재·보선 후 재경선 카드’를 던졌다. 지금 전당대회를 열 경우 당내 권력 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재·보선에 악재가 되므로 현재 노무현-한화갑 체제로 재·보선을 치른 뒤 재경선을 하자는 것이다. 노후보측은 재신임보다 강도가 더 센 재경선을 노후보의 기득권 포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노후보가 당장 재신임 논란을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나온다.



노후보가 재경선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지방 선거 패배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노후보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방 선거 패배의 책임은 95% 이상 김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게 있다고 잘라 말했다. 노후보의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반 노무현 진영의 흠집 내기거나 언론의 구색 맞추기용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진단에 따라 노후보측은 지방 선거 참패에 대한 처방을 DJ와 절연하는 쪽으로 집중하고 있다. 부패 스캔들에서만 벗어난다면 대선은 문제없다는 것이다. 노후보 지지 세력으로 분류되는 쇄신파 의원들이 6월14일과 17일 잇달아 모임을 가지고 △김홍일 의원 탈당 및 홍업·홍걸 씨 엄정 수사 △아태재단 사회 환원 등 쇄신안을 전면 수용하라고 촉구한 것은 DJ와 고리를 끊기 위한 서곡이다.



재경선 카드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지방 선거는 반 DJ 정서에서 비롯된 만큼 이 문제만 해결하면 8·8 재·보선을 잘 치를 수 있고, 그 경우 재경선은 노풍을 다시 점화하는 호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 노무현 진영은 노후보가 책임론을 피하기 위해 술수를 부리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노후보 발언 직후 안동선 고문은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재·보선 이후 자기 거취를 묻겠다는 것은 상황 변화도 없이 재·보선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노후보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던 지지도도 이회창 후보에게 10% 포인트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당장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김기재 고문은 “월드컵이 끝난 후 정몽준·박근혜 등 제3 세력과 합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인제 의원과 가까운 충청권과 경기·강원 출신 의원들은 대체로 이런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한 충청 출신 의원은 노후보 지지도가 거품이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무현 지지자의 대다수는 20~30대로, 결국 투표장에 나가지 않을 반쪽 표다. 대선에서는 투표율이 올라간다고 하지만 전체 투표율이 올라가면 50~60대 투표율도 그만큼 올라간다. 결국 처음부터 노풍은 거품이었다.”



친 이인제 진영이 후보교체론과 제3 세력 영입을 주장하는 데는 다분히 ‘감정’이 담겨 있다. 이인제 의원이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일만은 막겠다는 식이다. 당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들이 결국 탈당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이인제 의원과 가까운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탈당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샐러리맨이 직장을 옮길 때도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한다. 솔직히 (민주당의) 구심력이 앞으로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오르지는 않을 것이므로 앞으로 원심력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단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다.” 쇄신파 의원들이 위기 타개책으로 노무현 후보-이인제 대표 안을 내놓은 것도 이런 이인제 진영의 기류를 감안한 것이다.



“반 이회창 세력 재집결할 기회 될 수도”



반 노무현 진영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당초 통과 의례 정도에 그치리라던 ‘노무현 재신임론’은 갈수록 혼란에 빠지고 있다. 노후보에게는 후보 선출 이후 최대 위기가 닥친 셈이다.
하지만 이번 지방 선거 후폭풍을 제대로 넘기고 나면 오히려 노무현 중심으로 당이 급속히 재편되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노후보 지지도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데다 그를 대체할 만한 대안이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당 지도부는 8·8 재·보선에서 노후보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특별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한 심리학자는 “이번 지방 선거를 계기로 유권자들은 DJ 정권에 분풀이를 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반 이회창 세력이 노후보를 중심으로 재결집할 토대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당 일각에서는 이번 갈등 과정을 거치면서 노후보와 색깔이 다른 인사들이 일부 떨어져 나가는 것이 도리어 대선 가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관건은 과연 노후보가 위기를 기회로 뒤바꿀 만한 내공을 발휘하느냐 여부다. 아직까지 노후보 진영은 상황을 차분히 분석하기보다 다분히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분위기다. 재경선 카드도 악수(惡手)라는 평이 많다. 현재 상황으로는 노후보가 솟아날 구멍이 바늘 구멍보다도 작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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