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따라 뿔뿔이 헤매는 당심
  • 안철흥 기자 (epigsisapress.com.kr)
  • 승인 200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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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의원들의 이율배반 ‘노무현 대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자의 은밀한 심리 상태가 드러나기도 한다. 이번 민주당 대의원 조사도 마찬가지다. 대의원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노무현 후보 지지도가 떨어진 이유에 대한 대의원들의 평균적인 반응은 일반 국민과 대동소이하다. ‘대통령 아들 게이트 등 친인척 비리 문제’(46.0%)를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이어 ‘노후보 본인의 실수 등 자질 부족’(27.2%), ‘현정부의 국정 전반에 걸친 실정’(12.1%), ‘민주당 의원들의 비협조’(9.9%), ‘노후보 참모진의 문제’(4.1%) 순이다. 노후보의 자책보다 외부 요인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정서를 세분해서 살펴보면 이들이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지역 별로는 수도권·충청과 영호남의 시각차가 뚜렷했다. 수도권 대의원들이 첫째 원인으로 든 것은 ‘아들 게이트’(44.2%)였지만, 수치는 전체 평균보다는 낮았다. 충청권 대의원들은 ‘후보의 자질 부족’(35.5%)을 ‘아들 게이트’(30.1%)보다 높게 보았다. 반면 영호남 지역에서는 ‘아들 게이트’나 ‘실정’ 등 외부 요인(대구·경북 63.6%, 부산·경남 65.57%, 호남 60.5%)을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다.


편차는 노후보에 대한 태도를 축으로 놓고 볼 때 극명해진다.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고 응답한 대의원의 44.1%는 지지율이 하락한 가장 큰 원인으로 ‘후보 자질 부족’을 들었다. ‘아들 게이트’라는 응답은 32.2%에 불과했다. 반면 ‘후보를 교체할 필요가 없다’는 대의원들은 ‘아들 게이트’(58.1%)나 ‘실정’(13.6%)을 ‘후보 자질 부족’(12.7%)보다 크게 생각했다. 한 정당의 대의원들이 동일 사안에 대해 이렇게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당내 갈등을 넘어, 이제는 자기 갈 길을 선택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민주당 대의원들은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불과 두 달 전에 그들은 정권이 거의 재창출된 듯이 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낙담 상태다. 노후보 지지율 등락보다 이들이 느끼는 심리적 등락 폭이 훨씬 커 보인다. ‘노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다시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도 우선 감지되는 것은 ‘자포자기’다. ‘가능성이 높다’(34.2%)보다 ‘낮다’(65.1%)는 응답이 2배 가까이나 많다. 민주당의 ‘버팀목’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과연 국민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 항목에서도 ‘친노’와 ‘반노’ 대의원들의 생각은 극명하게 갈렸다. 후보교체론에 동조한 대의원들은 ‘역전 가능성이 낮다’(84.7%)고 답했고, 노후보로 그냥 가자는 데 동의한 대의원들은 ‘역전 가능성이 높다’(51.3%)고 했다. 역시 충청권에서 부정적인 인식이 높았고(‘높다’21.5%, ‘낮다’ 78.5%), 호남에서는 역전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보았다(‘높다’ 44.3%, ‘낮다’53.9%).


노후보를 지지하는 호남 출신 대의원들이 ‘투쟁 의식’도 높은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노풍의 최후 보루가 될지는 두고보아야 한다. 호남 정서는 ‘노무현’보다 ‘정권 재창출’이 우선이기 때문. 물론 노후보에게 위안이 되는 점도 있다. ‘노후보의 역전 가능성’(34.1%)이 ‘민주당의 대선 승리 가능성’(24.9%)보다 높게 나왔기 때문. 노무현만한 후보도 없다는 심리가 은연중에 드러난 지표다.


원인을 진단하는 민주당 대의원들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무겁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다. 그런 만큼 처방도 다르다. 특히 ‘객관’으로 포장할 수 있는 진단과 달리 처방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은 ‘노무현 후보의 위기 탈출 방안’에 대한 대의원들의 반응이다(복수 응답).


‘자포자기’ 완연, ‘헤쳐 모여’는 예정된 길?


‘당을 장악하라’(53.2%). 과반수가 이런 처방전을 제시했다. 다음으로 ‘언론과의 관계 개선’(44.7%), ‘대통령과의 차별화’(36.4%), ‘신당 창당’(36.2%) 등이 뒤를 이었다. 지역 별로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부산·경남에서는 ‘차별화’(46.2%)나 ‘신당 창당’(40.0%)이 '언론과의 관계 개선’(29.0%)보다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대구·경북에서도 차별화에 대한 선호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지역 특성 탓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걷어내면 이것만큼 변별력이 큰 항목도 없다. ‘반노’ 성향의 대의원들은 ‘신당 창당’(48.1%)과 ‘언론과의 관계 개선’(47.5%)을 첫째로 꼽았다. ‘당 장악’(44.3%)이나 ‘차별화’(27.1%)는 후순위다. 반면 ‘친노’ 성향 대의원들은 ‘당 장악’(60.2%)과 ‘차별화’(44.5%)가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했다. ‘신당 창당’(26.1%)이라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당 장악’과 ‘신당 창당’을 둘러싼 논쟁이 8·8 재·보선 뒤 민주당의 최대 화두로 떠오를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는 뜻하는 바가 크다. ‘정적’들의 노림수는 용어의 어감 차이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 질문에 대한 핵심 관전 포인트는 이것이 아니다. 대의원들이 제시한 해법을 보면 민주당이 정당으로서 기본적인 정체성마저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당 장악이나 대통령과의 차별화, 언론과의 관계 개선 등은 후보 본연의 일이 아니다. 반면 ‘이회창 후보 공격’(15.9%)을 통해 분위기를 ‘노·창 대결’로 반전시키거나, ‘소신 있는 정책을 개발하고 제시’(2.0%)하는 것은 해법 축에 끼지도 못하고 있다.

국내 정치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응답은 기이하다. 대의원들 스스로 ‘민주당 혐오증’에 걸려 있지 않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대의원들의 이율배반은 ‘노후보의 DJ 차별화 정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드러난다. 지지율 하락이 ‘아들 게이트’와 ‘실정’ 등 DJ 주변의 문제 때문이고,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당을 장악’하고 ‘DJ와 차별화’해야 한다고 응답했던 대의원들이 차별화 정도를 묻자, ‘DJ의 잘못한 점은 비판하되 잘한 점은 인정하고 계승해야 한다’(91.0%)고 한 발짝 물러섰다. 이는 지역이나 ‘친노’ ‘반노’를 가리지 않았다. 대의원 다수가 동교동계의 영향에 있으며 노후보가 뽑힌 것도 이들보다는 ‘국민 선거인단’의 힘 덕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후보에게 보내는 대의원들의 신뢰는 인색하기만 하다.


이런 대의원들과 함께 대선을 치른다는 것이 노무현 후보에게는 무척 힘든 일일 수도 있겠다. 역으로 이들 상당수는 일부 비주류 의원들의 ‘모반’에 동참할 채비를 이미 마친 듯 보인다. 노후보와 이들이 함께 찾을 수 있는 해법은 뭘까. 이번 민주당 대의원 조사는 그 해법이 파격적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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