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치려다 세계 경제 잡을라”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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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 치를 경우 유가 상승 불 보듯…일본·한국, 최대 피해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이 자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에 어떤 충격을 줄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가지 결론은 일찌감치 나와 있다. 즉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경우 소비 심리가 회복되어 경기 진작 효과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제통화기금 호스트 퀼러 총재는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가뜩이나 회복세가 둔해진 세계 경제에 큰 주름이 질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미국 경제는 지난 1/4분기에는 5% 성장률을, 그리고 2/4분기에는 1.3% 성장률 보여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라크 전쟁이라는 돌출 변수가 생길 경우 또다시 침체의 늪에 빠져들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단기전 되면 경기 회복 도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 무엇보다 전비가 급증해 가뜩이나 빚더미에 오른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 상태에 압박을 가할 것 같다. 지난 10월1일 회계 연도가 시작된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는 1천4백50억 달러에 육박한다. 이라크 전쟁 경비가 1회성 지출이라고는 하지만, 전비(8백억 달러)의 80%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일본·독일 등 우방들이 지출했던 페르시아 만 전쟁과는 다르다. 미국은 국제적 공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할 경우 이라크 전쟁 경비를 거의 전적으로 부담해야 할 처지다. 백악관 경제보좌관인 로런스 린제이는 미국 국내총생산 규모를 10조 달러로 상정할 때 이라크 전쟁에 1∼2%(1천억~2천억 달러)를 지출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부 행정부 고위 인사들은 이라크 전쟁에 따른 효과로 경기 진작을 거론하기도 한다. 최근 폴란드를 방문한 그랜트 알도나스 상무차관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국제 원유 시장의 원활한 원유 공급에 따라 유가가 하락해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되리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과연 부시 행정부측 인사들의 주장대로 이라크 전쟁이 미국 경제에 안겨줄 충격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최대 변수는 전쟁이 과거 페르시아 만 전쟁처럼 속전속결이 아닌 불투명한 장기전으로 접어들 경우다. 이때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는 원유 공급 차질과 그에 따른 유가 상승을 꼽을 수 있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 유가는 10개월 전만 해도 15달러 정도였지만 이라크전쟁론이 번지면서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최근 딕 체니 부통령이 이라크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는 단 하루 만에 배럴당 60 센트나 올랐다. 페르시아 만 전쟁이 터진 직후에도 하루 평균 4백20만 배럴 정도의 원유 공급이 막혀 기름값이 배럴당 15 달러에서 40 달러로 껑충 뛰었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 교수인 리처드 쿠퍼 박사는 최근 <뉴욕 타임스>와 가진 회견에서 “1991년 미국 경기 침체의 원인은 페르시아 만 전쟁 이후 유가 상승 때문이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유가 상승에 따른 충격은 이번에도 재연될 것인가. 월스트리트 투자 분석가들은 만일 유가가 배럴당 20 달러 정도만 올라도 미국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0.5% 감소하고 물가도 거의 1% 정도 상승할 것으로 내다본다. 결코 작지 않은 충격이다.






“이라크 전쟁 나면 미국 경제 침몰”



만약 유가가 배럴당 50 달러까지 치솟을 경우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히 유가가 상승할 경우 하루 5백만 배럴을 소비하는 일본이나 2백30만 배럴을 소비하는 한국을 포함해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대다수 아시아 나라들에는 큰 피해가 예상된다. 현재 유사시 원유 공급 차질에 따른 위험 노출도 순위로는 일본이 가장 앞서고 한국 중국 타이완 싱가포르 태국이 그 뒤를 따른다. 최근 홍콩의 모건 스탠리 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해 유가 상승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경우 아시아 전체 경제성장률이 1% 낮아질 것으로 본다.



유가 상승은 다름아닌 국제 원유 시장의 수급 차질에서 비롯한다. 미국 외교협회의 중동 문제 전문가인 요셉 이브라힘은 최근 CNN 방송과의 회견에서 “현재 전세계의 하루 평균 원유 소비량은 7천5백만 배럴인데 여기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빚어질 경우 곧바로 심각한 유가 상승이 발생한다. 이라크 전쟁은 필연코 공급 차질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특히 사담 후세인이 대미 항전의 일환으로 자국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인근 국가의 정유 시설을 파괴할 경우 국제 원유 시장은 큰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다. 미국 정부는 유사시에 대비해 60일간 버틸 수 있는 5억8천만 배럴 상당의 전략 비축 원유를 보유하고 있지만 국내 유가를 안정시키기에는 모자라는 양이다.



문제는 연초부터 기업들의 회계 부정, 수익 감소, 투자가 불신 등으로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 경제가 과연 유가 상승에 따른 악재들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프린스턴 대학 폴 크루그먼 교수는 1970년대 이후 석유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경기 침체가 뒤따랐음을 상기시키고 “이라크 전쟁은 일순간에 미국 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각종 물가가 오르고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붙을 경우 그나마 내수의 힘으로 버텨온 미국 경제는 힘없이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기 부양 수단으로 미국 연방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금리 인하 조처도 현재로서는 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금리는 1.75%로 40년 만에 거의 바닥이어서 추가로 금리를 내린다 해도 전쟁에 따른 불안 심리가 높아진 소비자들이 예전처럼 ‘백화점 쇼핑’을 즐길지 의문이고, 재고가 남아돌아 골머리를 앓는 기업들이 추가 투자에 나설 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흔히 전쟁이 경제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믿고 있지만, 적어도 이라크 전쟁만큼은 미국 경제에 매우 좋지 않다”라고 진단한 것은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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