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년 올해의 인물' 행동하는 네티즌
  • 이문재·차형석 기자 ()
  • 승인 2002.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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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자신감을 확인한 네티즌들이 12월,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촛불을 들고 다시 광장으로 나섰다.
해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시사저널> 기자들은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며 한 해를 정돈한다. 현장에서 느꼈던 체감 온도를 바탕으로 독자들의 반응과 시대적 흐름을 감안하며 저마다 한 표를 행사한다.
편집국 기자들의 투표 결과, 올해의 인물은 단연 네티즌이었다. 11월30일 이후 주말이면 자발적으로 광화문에 모인 네티즌은 ‘축제 인간’에서 ‘근대적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광장을 되찾은 것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별 올해의 인물(34~42쪽)에 이어 최악의 인물도 함께 선정했다.

 
다섯 살짜리의 ‘커밍 아웃’, 그리고 6개월 만의 변신. 1997년 인터넷이 대중화한 이래 처음으로 온라인(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던 네티즌들이 오프라인(현실 세계)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6월,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을 붉은 물결로 뒤덮으며 광장을 되찾았던 네티즌들이 6개월 뒤인 12월, 같은 장소에서 촛불을 든 ‘반딧불이’로 거듭났다. 붉은 티셔츠에 태극기를 두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시민들이 저마다 촛불을 밝혀들고, 억울하게 죽어간 의정부의 두 여중생을 추모하며 ‘부시는 사과하라’고 외쳤다.

사이버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2002년을 네티즌들이 현실 세계로 뛰어든 원년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행동하는 네티즌’이 등장한 것이다. 행동하는 네티즌은 단순한 네티즌, 즉 인터넷 사용자와는 구분된다. 사이버문화연구소 민경배 소장은 거리로 나선 네티즌이 ‘발바닥 행동’이라면, 단순한 인터넷 사용자는 ‘손가락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손가락 행동’에서 ‘발바닥 행동’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사이버 문화는 아직 ‘문화’가 아니었다. 1999년 초고속 정보 통신망이 깔리면서 인터넷 이용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사이버팀장 이요훈씨에 따르면, 세계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가자는 캠페인이 인터넷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집단 무의식’을 형성했지만, 사이버 공간은 대부분 게임과 게시판의 ‘잡담’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씨는 “2000년 말, 30대 고학력 주부들이 인터넷에 적극 참여하고 학교 전산망이 갖춰지면서 인터넷이 일상화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네티즌은 현실과 분리된 낯선 계층이었다.

 
지난해 9·11 테러 직후 온라인은 현실 세계의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각종 안티 사이트와 <딴지일보> <오마이 뉴스>와 같은 인터넷 대안 언론이 이른바 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올해 들어서는 월드컵 열풍 이전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있었다. 전인구의 25%가 참여한 6월의 거리 응원전에 이어, 최초의 사이버 정당인 개혁적 국민정당이 탄생했고, 하반기에는 ‘엽기’를 대체한 ‘사이버 폐인’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사이버 파워가 수면 위로 나온 한 해였다.

 
한 사람의 손가락이 수많은 네티즌의 발바닥을 움직이게 한 가장 최근의 사건이 광화문 촛불 시위였다. 지난 12월14일 오후, 서울 시청앞과 광화문은 물론 전국 60여 곳에서 동시에 열린 ‘오만한 미국 규탄과 주권 회복을 위한 10만 범국민 평화 대행진’은 한 네티즌(‘앙마’)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짧은 글이 도화선이 되었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웁시다. 광화문에서 효순이와 미선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가 됩시다’.
11월27일 오전 6시 인터넷에 오른 이 글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하루 만에 국내 MSN 메신저 이용자 90%가 온라인 상에서 상장(喪章) 달기 운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3일 뒤, 광화문에 모인 만여 명의 ‘반딧불이’는 네티즌들이었다.

과거 386세대들의 가두 시위는 최소 1주일 이상 걸렸다. 촛불 추모제를 처음 제안한 ‘대한민국 네티즌 앙마’(김기보씨, 29·학원강사)도 놀랐다고 했다. 11월30일 토요일 저녁, 광화문에서 열린 첫 촛불 시위는 1주일 뒤인 12월7일 더 커지고, 그 성격도 달라졌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와 민주노동당, 한총련 소속 활동가와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참여해, 자발적으로 모인 네티즌들과 약간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자발적 참여로 이룬 ‘중심 없는 운동’

이 날 촛불 시위를 동영상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울카맨’은 12월7일이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날이었다고 평가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울카맨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에 따르면, 차량이 아닌, 개인이 아닌 ‘사람들의 무리’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대사관 앞에 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무리는 둘로 나뉘었다. 인터넷을 통해 자생적으로 반미 의식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키워온 네티즌들은 ‘깃발부대’의 지휘에 따르지 않았다.

 
10만 평화대행진이 열리기 하루 전인 12월13일 저녁, 학원 강의를 마친 앙마 김기보씨를 서울 연신내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씨는 자신의 ID인 앙마는 붉은악마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10여 년 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반항하는 의미를 담아 앙마라는 이름을 지었다. 앙마가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바에 따르면, 네티즌들은 권위를 부정한다. 현실 세계와 달리 네티즌들을 불러모으는 기준은 ‘취향’이다. 취향이 맞으면 나이 학력 직업 성별 지연 혈연 따위의 경계를 뛰어넘어 소통한다.

김씨는 이번 촛불 추모제를 ‘중심이 없는 운동’이라고 명명한다. 12월7일 광화문에서 연설 기회를 가졌을 때, 김씨는 이번 운동의 키워드를 ‘비폭력, 민주주의, 불복종’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김씨는 “나는 제안자이지 조직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나의 권위(중심)가 명령하고 그에 따르는 1980년대식 운동 방식은 네티즌 사회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네티즌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옹호한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같은 태도는 2년 전부터 널리 퍼진 ‘리플(게시판에 오른 타인의 글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행위) 문화’가 낳은 결과이다. 네티즌들은 언제나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소통은 자신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가령 대학 교수가 신문에 싣는 칼럼이 현실 세계에서는 일정한 여론을 형성하지만, 게시판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게시판에 권위적이거나 난해한 글, 엉뚱한 글이 올라오면, 네티즌들은 ‘귀차니즘’(귀찮은 글)이라는 리플 한 개를 올려놓고는 등을 돌려버린다.

김씨는 “네티즌들이 자기중심적이지만, 근대적 주체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한다.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세우고 또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네티즌은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다. 김씨는 “한 사람을 오래 속이기는 쉽지만, 여러 사람을 오래 속이기는 불가능하다”라며 인터넷이 갖고 있는 장점을 강조했다.

김씨가 보기에, 네티즌들이 자기중심적이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른바 '네티켓'(네티즌의 에티켓)이 차츰 자리잡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네티켓이 필수 덕목이다. 네티켓을 지키지 않는다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더불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터넷 이용자들 가운데서 자기 양심의 부름을 받고 거리로 나선 행동하는 네티즌들. 불과 다섯 살밖에 안 되었지만, 그들이 올 한 해에 보여준 사이버 파워는 현실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릇된 권위와 불합리, 수직적 소통 방식을 흔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카페’ 벗어나 ‘광장’으로 커밍아웃

앙마 김기보씨는 “나는 시민 사회의 표본을 광화문이라는 공간에서, 그리고 네티즌들로부터 배운다”라고 말했다. 12월14일 밤, 10만 평화대행진 2부 행사에서 선보인 자유발언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광화문 한복판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시민들은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그 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여성은 “우리는 더 이상 모래알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민경배 소장은 “권위주의 정권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광장은 금기였다”라고 말했다. 광장에 나선다는 것은 곧 체포와 구속을 의미했다. 국민들은 술집이나 노래방·PC방과 같은 밀실로 스며들었다. ‘모래알’들이었다. 시민들이 고대하던 광장은 사이버 공간에서 먼저 형성되었다. 게시판과 토론방을 통해 네티즌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익혔다. 하지만 줄곧 사이버 공간에는 합리적인 토론이 없다는 공격을 받았다.

민소장에 따르면, 서양 지식인들의 공적 영역이었던 카페 개념을 적용했기 때문에 사이버 공간이 지탄을 받았다. 민소장은 사이버 공간은 20세기 초반 파리의 카페가 아니고, 그리스 시대의 광장과 닮았다고 말한다. 박수와 야유가 오가는 시끌벅적한 아테네의 광장이 이번 촛불 추모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붉은악마에서 ‘앙마’로 이어지면서 네티즌들은 축제의 광장을 시민의 광장으로 변모시켰다. 12월14일 밤 광화문 한복판에서 만난 홍세화씨(아웃사이더 편집위원)는 “건국 이래 이렇게 자발적인 반미 시위는 처음이었다. 시청 앞과 광화문이 명실상부한 시민의 광장으로 거듭났다. 종미(從美) 수구 세력과 극우 반공주의가 약해지기를 기대한다. 이 광장에서 21세기가 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네티즌 파워는 올해 광장에서 ‘입사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민경배 소장은, 한국의 사이버 문화가 생산자 문화의 단계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공간이 기업의 주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바람에 사용자들이 소비자로 전락해 있다.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고 행위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번 선거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네티즌들의 자발적 참여를 가로막는 낡은 잣대를 버려야 한다고 민소장은 강조한다.

또 있다. 행동하는 네티즌을 ‘유목민 전사’라고 표현하는 문학 평론가 서동욱씨는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도 죽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인터넷은 잠재적으로 마녀 사냥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씨에 따르면, 네티즌은 모든 것을 알고, 또 어디에든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고, 또 아무 곳에도 없을 수 있다. 자칫 네티즌이 ‘대중 속에서 유실된 무뇌아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온라인에서는 '사이버 폐인'이 단연 화제였다.사이버 폐인들은 신 구씨나 장승업을 우상으로 하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등 '전혀 다른 코드'를 사용한다.  

소통에서 ‘응답의 책임’을 강조하는 서동욱씨는, 독일 시인 횔덜린의 시구 ‘위험이 자라는 곳에 구원의 힘도 자라네’를 인용한다. 현대 문명이 그러했듯이 인터넷은 구원일 수 있지만, 위험일 수도 있다. 인터넷의 바람직한 미래는 네티즌의 ‘손가락’이 아닌 ‘발바닥’에 달려 있다. 계속 손가락에 머무른다면, 일부 정치권과 주류 언론, 그리고 낡은 이론이 그런 것처럼 네티즌은 탈정치화의 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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