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개축’ 누가 삽 뜨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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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개혁파가 전위대 형성…중도 재야 그룹도 공동 보조



대통령 선거 이틀 전인 12월17일, 노무현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신당 창당 수준으로 정치 개혁을 하겠다’와 ‘김대중 정부 실정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 날 회견을 보면서 정치개혁추진위 총간사를 맡고 있던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남몰래 웃었다.



회견문안은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해찬 선대위 기획본부장이 마련한 것으로, ‘노무현-정몽준 공조’를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개혁추진위원회가 낸 안으로, 철저한 당 개혁과, DJ와의 차별화를 선언하자는 것이었다. 노후보는 이 두 가지 안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선대위 집행부 주도로 선거운동을 치르던 노후보가 막판에 전위 기구인 정개추의 손을 들어준 것.



이로부터 닷새 뒤이자 노무현 당선이 확정된 지 사흘 뒤, 이른바 일요일 아침의 반란이 일어났다. 소장 개혁파 23명이 ‘지역분열 구도와 낡은 정치의 틀을 깨기 위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 이들은 선거 과정에서 주로 정개추(조순형 신기남 천정배)와 국민참여운동본부(정동영 추미애 송영길 임종석), 국가비전21위원회(정세균) 등에서 일한 의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민주당 쇄신운동을 주도했던 바른정치모임 회원들이기도 하다. 또한 김성호 김태홍 이강래 이종걸 이호웅 정장선 등 초선 의원 14명도 당 쇄신에 앞장섰던 이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후보 단일화 이전 노무현 후보가 10%대 지지율로 흔들리고 있을 때부터 ‘친노’(親盧) 노선을 견지해온 그룹이기도 하다. 개혁 성향이 강한 이들은 17일 회견과 20일 당선자 첫 회견에서 당 개혁이 강조되자 ‘노심(盧心)’을 읽고 행동에 나섰다.



추미애·신기남 최고위원 사퇴로 신호탄 올려



이들은 선거 다음날인 12월20일 오후 ‘거사’를 위한 첫 모임을 갖고 성명서를 내기로 결의했다. 이어 송영길 의원이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뒤, 토요일인 21일 다시 만났다. ‘탈당 각오로 나서야 한다’는 조순형 의원의 제안에 따라, 이들은 교섭단체 구성 요건이 넘도록 2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내는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쳤다. 또한 제주도에 휴가차 내려가 있던 노당선자에게도 전화로 통보했다. 22일 일요일, 조찬 자리에서 최종 문안을 확정한 다음 이들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어 23일 추미애·신기남 의원이 최고위원 직을 사퇴하면서 최고위원 전원 사퇴를 요구했다.



선거 승리 사흘 만에 ‘폭탄’을 맞은 민주당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일요일 오후 한화갑 대표는 정균환 원내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대책을 논의했다. 박상천 최고위원, 후단협 소속 의원들, 동교동 구파 의원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이들이 특히 긴장했던 것은 23명 대부분이 노무현 친위대 성격의 의원들이었기 때문. 따라서 이들의 성명에 곧바로 당선자의 의중이 실린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노당선자의 민주당 개혁 프로그램이 다분히 ‘당파적인 의도’를 가진 것으로 비칠 우려도 있었다. 특히 구주류 인사뿐만 아니라 일부 개혁 성향 의원들마저 동요 기미를 보이자 이른바 신주류 내부에서도 완급조절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당선자가 12월23일 선대위 마지막 회의에 참석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을 것이니 당에서 알아서 하라”고 말한 것이나, 한대표와 만나 제도 개혁을 먼저 추진하고 인적 청산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당과 소장 개혁파 사이의 교량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이들이 김원기 상임고문과 정대철 선대위원장을 비롯해 선대위 집행부에 포진한 중견 의원들이다. 이상수·이해찬·김경재·임채정 본부장과 신계륜 비서실장 등이 그들. 민주당 내에서는 이들을 ‘중도 재야파’로 부른다. 대부분이 중도적 입장이며, 재야 출신(임채정 이해찬 이상수 신계륜)이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신주류는 이렇게 소장 개혁 그룹과 중도 재야 그룹의 연합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노무현 민주당호’의 앞날을 이끌 두 축이다. 최근 안가를 집무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노당선자가 안가로 민주당 의원들을 부른 순서는 흥미를 끈다. 가장 먼저 안가를 찾아 노당선자와 면담한 인사는 천정배 의원이다. 또한 식사 자리에 초대된 첫 인물은 김원기·정대철 의원이다. 이들은 천의원이 면담을 마치고 돌아간 얼마 후 안가를 방문해 노당선자와 식사를 함께 했다.



김원기 의원은 노당선자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정치 스승이다. 노당선자는 후보 시절 의원회관으로 반노파 인사들을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면 김의원 방에 들러 앉아 있다가 가고는 했다. 김의원 방은 휴식처이자 일종의 안가였던 셈. 김의원은 최근 ‘노무현 정권의 순조로운 출발을 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할 만큼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대철 의원은 선대위원장을 맡은 뒤 지근 거리에서 노당선자의 보호막 역할을 해왔고,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막후 조정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차기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할 계획.



노무현 사단 ‘파워맨’ 천정배 의원 역할 커질 듯



소장파 중에서 노무현 사단의 ‘파워맨’으로는 천정배 의원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는 경선 때 유일하게 노후보를 지지한 현역 의원이었다. 후보가 된 뒤에는 원칙론을 선도하면서 이해찬 임채정 등 선대위 의원들과 마찰하기도 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이어서 노당선자와도 가끔 냉각기를 가질 정도. 그러나 선거 막판 노후보가 힘을 실어주었고, 앞으로도 그의 역할이 커질 전망이다.



조순형·신기남 의원 등 정개추를 이끌었던 이들도 노당선자의 신임을 바탕으로 당 개혁에 전위 역할을 떠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정동영·추미애 의원은 대중 정치인 면모를 갖춘 인물들로, 노후보에 의해 선거 막판 차기 리더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쪽이 민주당 개혁의 조타수 역을 떠맡게 될까. 중도 재야 그룹은 소장 개혁파가 너무 앞질러간다면서 불안해 하고, 소장파는 중도 그룹이 당 개혁을 미지근하게 봉합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분위기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신주류 내부의 주도권 경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기우라는 것이 이들의 반응.



중도 재야 그룹에 속하는 한 인사는 가을이 오기 전에 귀뚜라미가 먼저 우는 법이라면서 당 개혁에 대한 신주류 내부의 이견이 곧 조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애초 신당 창당 불사를 외쳤던 송영길 의원도 12월27일 통화에서는 ‘초심이 그렇다는 것’이라며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노당선자는 의원 입각 최소화 방침과 함께, 이들 신주류 의원들에게 당 개혁에 모든 힘을 집중해 달라고 요구해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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