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지 마, 갈아엎을 거야”
  • 정희상·나권일 기자 ()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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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우군’으로 믿었던 평검사들의 반발을 아우르고 인적 청산을 통한 ‘검찰 개혁’을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
"지금 인사를 중단하면 그분들(검찰 상층부)은 가만 있겠는가. 그들도 정치 역량을 가지고 있는 한다 하는 분들이다. 인사든 개혁이든 다 무산시킬 역량이 있다. 왜 이 시점에서 여러분이 제 인사를 무산시키려 하는가?”
지난 3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가진 토론회에서 이번 검찰 간부 인사 배경을 놓고 대통령이 가졌던 비장한 심경을 표현한 대목이다. 그동안 자기와 코드가 같다고 여겨온 평검사들이 인사에 반발하는 것에 대한 원망감마저 밴 이 발언에 이어 노대통령은 애원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안 되도록(인사가 무산되지 않도록)당부하고 부탁한다. 이번 한 번만, 처음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고 가니 믿어 달라. 다음부터는 인사위를 통해서 하겠다.”





이어 노대통령은 토론장에 나온 평검사 40여 명을 향해 “여러분과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가면 검찰이 바로 갈 수 있다. 여러분을 신뢰한다. 여러분도 나를 신뢰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한 평검사는 “대통령과 (평검사들은) 코드가 맞는다. 대부분 386세대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어느 세대 못지 않다”라는 말로 노대통령의 검찰 개혁 과정에서 결국은 평검사들이 ‘우군’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했다.


반격할 틈 주지 않고 찍어내기


‘힘 있는 개혁 대상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인사를 단행한 뒤 국민의 환호 속에 개혁에 탄력을 받는다.’ 이같은 기조 아래 추진되는 노대통령의 검찰 개혁 작업은 10년 전 김영삼 정부가 정치 군인 조직인 하나회를 전격 숙정한 것과 닮은꼴이다. 우선 과거 정권에서 국민적 원성을 샀던 권력 기관의 핵심 인물들을 인사를 통해 배제함으로써 국민의 성원을 한껏 받는 점이 그렇다. 하나회 숙정 때도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전격 경질하고, 이어 대규모 후속 인사를 통해 군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회 멤버들을 내보냈다.


하나회에 정면으로 맞선 당시 대통령의 `‘용기’에 국민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검찰 간부 인적 청산 방침에 대해서도 국민의 성원은 뜨겁다. 문민 위주의 군통수권 확립이라는 당시의 명분과 ‘`법무부 문민화를 통한 검찰 중립화 추진’이라는 현정부의 개혁 명분도 닮은꼴이다.


노대통령은 평검사와 가진 토론회를 계기로 검찰 개혁에 박차를 가할 힘을 얻었다. 헌정 사상 초유의 텔레비전 토론회를 지켜본 대다수 국민은 노대통령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검찰의 토론 수준과 태도에 실망한 네티즌들의 항의 글이 수천 건씩 올랐다. 3월9일 토론회를 통해 검찰 개혁은 이제 더 이상 검찰과 법무부만의 숙제가 아닌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를 것이다.


노대통령이 새 정부의 첫 과제로 검찰 개혁을 잡은 이유는 과거 정부에서 얻은 교훈도 크게 작용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초기에 검찰을 개혁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노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하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실정한 원인을 집권 초반에 정치 검찰을 제대로 손대지 못한 데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취임 초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구호를 내건 DJ의 개혁은 이미 유착이 깊어진 동교동계 실세 정치인들과 검찰 간부들의 반대에 부닥쳐 유야무야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모든 개혁의 발목이 잡히기 시작했다는 것이 노대통령의 인식인 것이다.





노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인수위에 획기적인 검찰 개혁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의 정치 중립화를 위한 카드로 서열과 성별을 파괴한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선택되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을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국민의 감시와 통제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보기에, 그동안의 법무부는 검찰의 식민화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법무부 문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썼던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검사들의 반발에 대해 “법무부장관의 인사 제청권과 총장 등에 대한 업무상 지휘권을 부인하면 검찰이 독재에 빠질 위험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 인적 청산, 후 제도 개혁’이라는 개혁 순서를 잡은 배경에는 검찰 수뇌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노대통령은 여러 차례 검찰 상층부 인사들을 못 믿겠다고 표현했다.
노대통령이 검찰 상층부에 대해 더욱 큰 불신을 갖게 된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의 일이었다고 한다. 일부 검찰 간부들이 음양으로 보여준 실망스런 모습 때문이었다. 노대통령 진영과 가까운 한 재야 법조계 인사는 이렇게 전했다.


당선자 진영 얼르고 겁준 간부들


“노대통령이 당선되자 검찰 간부들 중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당선자 진영에 ‘줄대기’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만난 몇몇 검찰 간부도 ‘어차피 칼을 들고 있는 곳이 검찰인데 괜히 검찰을 건드려 정권 초반부터 피곤해지지 말고 바터제로 하자, 지난 정권들도 초반에는 다 그렇게 했다’라며 은근히 중재를 서 달라고 요청했다. 검찰 간부들의 이런 분위기가 새 정부에 흘러들어가지 않았겠는가.”


그에 따르면, 적지 않은 검찰 간부들이 수사를 통해 새 정부의 정책에 암묵적으로 협력할 테니 공생하자는 의향을 비쳤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검찰을 섣불리 손댈 경우 누구든 당할 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도 노대통령 진영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검찰 상층부 일각이 당근과 채찍을 암시하며 줄대기하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절했다. 노대통령 눈에는 지난 2월 서울지검이 갑자기 기획 수사를 벌인 SK건도 검찰의 아부성 수사로 비쳤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은 ‘속도조절론’을 내세우며 검찰의 수사 시점과 의도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이같은 일련의 흐름을 접하면서 노대통령은 검찰 상층부 인사들이 새 정부를 길들이기 위해 고도의 정치 행위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인적 청산을 통해 검찰을 탈바꿈시키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까지 검찰에 신세진 일이 없는 노대통령으로서는, 집권해서도 검찰에 아쉬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개혁 추진의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이같이 나오자 검찰 수뇌부는 급기야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일선 검사들은 ‘조직’의 자존심이 무너졌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검찰 조직 안에서는 `‘노정권이 강금실 법무부장관을 점령군으로 투입해 검찰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과 격앙된 정서가 삽시간에 번졌다.
검찰이 동요하게 된 발단은 3월 초부터 서울 서초동 검찰청 주변에 퍼진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노대통령이 사시 17회 동기생인 정상명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법무부 차관으로 밀고 있다는 얘기가 나돈 것이다. 더 나아가 고검장 승진은 노대통령과 친한 민변의 최병모 변호사 동기 기수(16회)까지, 검사장 승진 대상자는 문재인 민정수석의 사시 동기 기수(22회)까지 내려간다는 식으로 ‘밀실 측근 인사’ 괴담이 나돌았다.


그러나 3월9일 토론회를 통해 이같은 검찰의 ‘음모론적’인 사태 인식은 조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왜곡된 피해 의식에서 나왔다는 점이 드러났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이미 인사 과정에서 검사 수십 명에게 자문했으며, 공식 경로인 법무부 검찰국에 인사 자료를 요청했으나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고 밝혔다. 차관 인선은 장관 소관이라며 인사 협의도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수뇌부, 사실상 항명·사보타지


결국 이번 인사 파동 과정에 검찰 수뇌부는 사실상 항명과 사보타지를 벌였던 셈이다. 토론회를 통해 이같은 검찰 수뇌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노대통령의 수뇌부 불신 표명이 거듭되자, 김각영 검찰총장은 3월9일 밤 자진 사퇴했다. 토론회 결과 김각영 총장이 사퇴하자 청와대는 드디어 본격적인 검찰 개혁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며 내심 반기고 있다. 노대통령은 이미 후보 시절부터 검찰 조직을 환골탈태시키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둔 것으로 알려진다.


첫 과제는 대대적인 정치 검사 축출을 통해 검찰을 탈정치화하는 작업이다. 김각영 총장이 사퇴함으로써 신임 검찰총장 및 검사장급 이상 물갈이 인사가 사상 최대 규모로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어 형사소송법·검찰청법·인사청문회법 등 각종 법령을 개정해 제도 개혁을 이룬다는 방침이다.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한시적 특검을 상설화하고,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를 신설하며, 인사청문회와 검찰 인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다. 또 수사권 일부 경찰 이양과 기소독점주의 완화, 검사동일체 원칙 개선 등 각종 제도 개혁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검찰이 수사를 종결한 사건에 대해 재정 신청을 확대해 검찰권을 견제하는 장치도 마련하기로 했다. 전직 고위 검사나 판사 출신 변호사가 형사 사건을 수임할 때 법조계가 예우하는 관행(전관예우)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도 노대통령의 지론이다.


문제는 개혁 추진 과정에서 주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초 노대통령은 부장검사 이하 평검사까지 ‘정치적 때가 덜 묻은’ 세력을 우군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도 지난주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평검사의 건강성에 주목하며, 개혁은 평검사들을 적극 끌어들여 대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진행해 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평검사들의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 대통령과 토론회까지 벌여야 했던 상황이 보여주듯 이들의 마음을 당장 사로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검찰청 내부 게시판에는 여전히 노대통령의 검찰 개혁을 또 다른 정치적 장악 의도라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평검사들의 글이 올라 있다. ‘현정부의 핵심 세력은 기수 파괴·능력 파괴라는 눈가림으로 국민을 속여 검찰 간부를 정권에 충성할 사람으로 모두 교체하여 검찰을 장악하고 정권의 도구로 이용할 것이다.’


정치권 자체에 대한 이같은 소장 검사의 피해 의식은 한국 정치와 검찰의 역사적 업보인지도 모른다. 검찰이 가진 피해 의식을 어떻게 벗겨주고, 정치권과 검찰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서로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느냐가 검찰 개혁의 성패를 가를 또 하나의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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