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난상토론 “헌재 판결 이렇게 본다”
  • 정리·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4.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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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수험생 4인 난상토론/“결론 정해 놓고 논리 맞춘 듯”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고시촌 예비 법조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서울시 신림동 부근에서 사법고시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 4명이 시내에 있는 한 주점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대학 생활 동안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없는 평범한 법학도였다.

박상수:버스를 타고 가다가 수도 이전 위헌 판결 뉴스를 들었어. 8 대 1이라니 충격이었다. 내가 그동안 헛 공부를 한 걸까? 사법 시험 몇 달 앞둔 수험생이 판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머리를 둔기로 맞은 느낌이야.

이한울:어휴, 올해 우리 고시생들은 헌법학 공부하기 바쁘겠다. 원래 그 해 나온 판례가 시험에 많이 나오잖아. 대통령 탄핵 심판에다 관습 헌법을 근거로 한 위헌 판결까지, 곧 학원가에 나돌 ‘2004년 최신 판례 요약집’은 예년보다 두껍겠는걸.

최우영:헌법이 사시생들에게 중요 과목이 된 것도 다 헌법재판소 덕이지. 예전 선배들은 헌법 교재로 얇은 책 한 권 본 게 전부였다는데. 헌법은, 수험생들은 관심 없고 학자들만 연구하는 법이었지. 그러다 헌법재판소 생기고 판례가 쌓이면서 중요 사시 과목이 되어버렸어.

박:위헌 판결을 내린 재판관 8명 가운데 7명이 관습 헌법을 위헌 근거로 삼았다고 해. 그런데 내가 관습 헌법이란 걸 본 건 헌법 교과서 첫 부분 반 페이지도 안 되거든. 헌법의 종류를 설명하면서 이런 게 있다는 것 정도였다고.

이:주변에서 헌법재판소 판결을 지지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어. 평소 노무현 정부를 욕했던 사람들도 이번 판결은 의아해 하더라구. 원래 고시생들이 교과서에 없는 논리로 판결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태지영:나는 평소 현정부의 수도 이전을 찬성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은 좀 무리라고 봐.

최:관습 헌법을 위헌의 근거로 인정하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 관습이고 아니냐를 판단할 유권 해석 기관이 헌재말고는 없다는 사실이야.

박:‘국어는 한국어다’라는 명제가 관습 헌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수도=서울’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 역사상 수많은 수도가 존재했고, 조선 시대에도 천도 논의는 있었어. <경국대전> 이야기까지 들먹이고 있지만, 수도의 위치는 본질적으로 국가의 정체성이라기보다 집권자의 행정적 문제라고 봐.

최:법이란 ‘사실이 아니라 규범이어야 한다’고 배웠어. ‘수도가 서울이다’라는 사실에서 ‘수도가 서울이어야 한다’라는 규범이 어떻게 나오는 거지? 아무리 수도 이전 반대 여론이 높다 하더라도, 국민 중 상당수가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을 규범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거든.
박:수도 이전이 위헌이라고 주장한다면 차라리 김영일 재판관 논리였던 헌법 제72조(국민참정권·국민투표 실시 요건) 위반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고 봐. 물론 수도 이전 사안을 반드시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논리적인 면에서 관습 헌법보다는 짜임새가 있어.

이:이번 판결로 헌법재판소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어. 난 평소 헌법재판소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었어. 사실 우리 나라는 대륙법 체제를 따르다 보니 판사들이 ‘법률 자동판매기’처럼 느껴지잖아. 입법부가 준 법을 토대로 기계적 판결만 할 뿐이지. 그런 면에서 헌법재판소 판결문은 뭔가 논리적 사고의 힘이나 학술적인 풍취가 느껴지곤 했거든. 고시생이 이런 말 하면 우습지만, 만약 헌법재판관과 대법관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나는 헌법재판관을 선택할 거야.
박:헌법재판소가 그동안 우리 사회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공을 많이 세웠지. 헌법 규정이라는 게 대법원에만 맡기면 잘 적용되지 않는 게 있었을 텐데. 법대 교수님이 ‘헌법재판소 덕분에 실질적 의미의 헌법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 나.

최:그런데 이번 판결로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헌법재판소로 달려가는 풍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그 어떤 법이라도 헌법재판소로 가면 번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니 말이야.

태:헌법재판소가 정치 세력 간에 대립이 있을 때 누가 우세한지를 가려주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이:미국도 공화당이 집권하느냐 민주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대법관이 바뀌고 판결 추세도 변하곤 하지. 한 법학 교수님이 ‘법적 정의는 발견이 아니고 설득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 판결을 보니 실감 나. 논리에 따라서 결론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결론이 먼저 있고 논리는 뒤에 짜맞추면 된다는 거지

최:전에 한 고시학원 강사가 ‘헌법재판관들은 사건을 받으면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세부적인 판결 논리를 소속 부하 연구원들에게 맡긴다’고 전하더군.

박:나도 교수님들에게 들은 말이 있어. ‘헌재가 자기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판결을 1년에 한두 번씩 한다’고 말이야.

최:존재 이유 증명이라면 정반대 효과가 날 것 같은데. 이번 판결로 헌법재판소 권위가 무너질까 봐 걱정이야. 나는 이번 판결을 헌법재판관들이 법을 뛰어넘어 구국의 결단을 내린 거라고 해석해. 가끔 어르신들이 법을 뛰어넘는 그런 판결을 하거든.

박:아무튼 이번 판결은 종래 학설을 뒤집는 판례니까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높아. 공부를 단단히 해둬야겠어.

태:하긴, 기존 이론을 깬 판례일수록 사법 시험에 잘 나오니까.

이:지난번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합헌’ 판결이 나왔을 때도 고시촌에서 한창 논란이 되었잖아. 결국 ‘시험에 나오면 위헌이라고 쓰라’는 게 대세였어. 또 성범죄자 신상공개법은 헌재 판결은 합헌이었지만 학원가에서는 위헌이라는 게 대세였고. 꼭 판례대로 답을 써야 좋은 점수 받는 게 아냐.

박:혹시라도 내년 사법시험에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 판결 내용이 출제되면 소수 의견이었던 전효숙 헌법재판관 판결문을 모범 답안으로 삼아서 쓰겠어.

최:나도 그래. 설마 허 영 교수님(헌재 판결을 적극 지지하는 헌법학자) 같은 분이 채점하지야 않겠지. 허교수는 헌법학계에 영향력이 큰 분이긴 한데, 요즘에는 시험 문제를 안 내고. 채점도 절대 안하실 분이니. 주로 젊은 법학 교수님들이 채점하실 테고. 그 분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하실 거야. 헌법재판관들의 정치적인 판결보다 내가 배운 이론을 따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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