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없는 ‘총성의 진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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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왜 ‘유신의 심장’을 쏘았나.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나와 세간의 이목이 다시 집중되고 있지만, ‘진실 게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당시 재판 과정 과 기록, 증언들을 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함으로써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10·26 사건이 일어난 지 25년이 흘렀다. 이에 따라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다양한 역사적 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10·26 사건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쉽지 않아지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10·26에 대해 아직도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서 박정희 시대의 잔재를 서둘러 정리해야 한다는 쪽과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쪽 사이에 미묘한 갈등도 일고 있다.

또 넓은 의미로 보면 유신체제를 평가할 때 불가피하게 포함될 수밖에 없는 ‘박정희 가족’이 현실의 전면에 포진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다. 10·26 그날 밤을 그린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박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도 그런 사례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공식으로 “박정희의 딸은 잊어 달라”고 당에 주문했다. 그러나 10·26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박대표측의 한 관계자는 “박대표도 10·26 사건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지만, 지금은 정치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라고 보기에 경계한다”라고 말했다.

김재규씨와 10·26 사건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내란 목적 살인’과 ‘우발적 살인’ 그리고 ‘우국적 거사’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국민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사건 직후 김재규 부장 일행을 체포하고 합동수사본부(합수부)를 만들어 단죄했던 전두환씨 등 신군부가 내린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평가이다. 신군부는 10·26 사건을 한마디로 ‘대통령이 되려는 과대망상증 환자에 의한 내란 목적 사건’이라고 규정해 기소했다.

물론 10·26 직후부터 신군부와 다른 해석과 평가가 나왔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씨가 사건 동기를 ‘국민의 희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거사했다’고 시종일관 주장한 사실이 변호인단을 통해 알려지면서였다. 종교계와 유신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재야 세력 일각에서는 김씨를 의사(義士)로 규정하고 구명운동을 벌였다.

신군부, 재판부에 압력 넣어

그러나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1980년 4월29일 기자회견을 통해 김재규씨에 대한 합수부의 시각과 다른 평가를 묵살하고 말았다. 이후 구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체포되었다.

10·26 사건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신군부가 김재규에 대한 평가와 단죄를 일사천리로 진행한 과정과 법리 적용 문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 일행과 변호인단이 신군부측과 충돌했던 쟁점은 사건의 ‘배경’과 ‘동기’였다.

10·26 사건을 일으킨 뒤 다섯 시간 만에 육군본부 벙커에서 보안사령부 요원들에게 체포된 김재규 부장은 계엄사령부 합수부(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에서 10일간 1차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전두환 합수부장이 발표한 김씨의 범행 동기는 다음과 같았다. ‘김재규는 평소 이권 개입이 많다는 개인적 비위로 박대통령으로부터 친서 경고를 받은 바 있고, 근래에는 정국 수습책의 거듭된 실패로 무능이 노정된 데다 군 후배이면서 연하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사사건건 업무에 간섭하는 방자한 월권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은 차실장만 편애하고 자신을 불신한다는 생각에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특히 요직 개편설과 함께 부마 소요 사태에 관련된 자신에 대한 인책 해임설이 파다하여 불안하던 차에, 현 정계 인물 중에서 대통령으로는 자기가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현직의 주요 인사와 군지휘관은 자기 영향권 내에 있다고 오판하고 부마 사태를 오히려 대통령 제거 기회로 역이용하여 시해 계획을 구상한 것이다.’

이후 사건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9년 12월4일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이 시작되자 비로소 김씨 일행의 거사 동기와 목적 등이 쏟아져 나왔지만 신군부는 일절 보도를 금지했다. 김씨 진술의 핵심은 시종 ‘유신 독제체제가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늘리기 전에 내가 직접 유신의 심장을 쏘아버림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앞당기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재규씨는 다음과 같이 거사 동기를 주장했다. “나는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조짐을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박대통령은 국민적 항거가 거세지면 스스로 저항하는 국민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10·26 사태가 없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했겠는가. 나는 다른 길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나 개인에게 있어 사적으로는 친형제나 다름없지만 개인적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라 해도 가능한 한 희생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김씨의 이같은 법정 진술에 대해 전두환씨측은 ‘아비를 죽인 패륜아’라고 공격했다. 대통령이 될 욕심이 없었다면 현장에서 왜 자결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대의(유신체제 제거)를 위해 소의(박대통령과 개인적 의리)를 희생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라고 조롱했다. 1심 최후 진술과 항소이유서, 항소이유 보충서, 변호인 접견기록 등을 통해 김씨가 ‘민주 회복’을 위해 거사했다는 말이 새어나가면서 1980년 봄부터 재야 일각에서는 이들에 대한 구명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황한 합수부는 김재규씨 일행을 조속히 처형하기 위해 재판을 초고속으로 진행하도록 재판부에 압력을 넣었다. 당시 국선 변호인으로서 1심 때부터 김씨 일행의 변론을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합수본부는 재판 일정표까지 짜두고 옆방에 모니터를 설치해 재판 광경을 감시했다.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진술이나 순수한 거사 동기가 거론되면 쪽지를 넣어 재판 방향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나에게는 국선 변호인이 뭘 그렇게 자세히 변론하느냐고 질책하기도 했다.”

 
김재규 “하늘의 심판인 4심에서 나는 이겼다”


이렇듯 신군부의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1심 재판은 12월18일 결심을 마치고 유석술 피고를 제외한 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피고 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초고속 재판은 항소심에서 도를 더해 1심 판결 후 한 달 만에 유석술 피고를 제외한 6명 전원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1980년 4월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 5월20일 이영섭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고 대법원 판사 14명이 참여한 최종 판결에서 항소는 8 대 6으로 기각되었다. 신군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낸 양병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정태원 판사는 보안사에 의해 법복을 벗었다. 이들의 소수 의견은 그 후 10여 년간 공개되지 못했다.

당시 선임이던 대법원 양병호 판사는 보안사에 끌려가 사흘간 온갖 수모를 당한 뒤 사표를 내고 나와서도 2년간 신군부의 방해로 변호사 개업을 못했다. 양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군법회의에서 넘어온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도 내란을 꾀했다는 법적 증거는 없었다. 군부가 대법원에 그런 식으로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기록을 꼼꼼히 검토했더라면 군법회의 판결이 깨져서 고등군법회의에 환송되어 내란을 입증할 조사를 다시 했든지 일반 살인으로 고쳐 나와 대법원 재판을 다시 했을 것이다. 김재규의 운명은 일반 살인죄를 적용하더라도 당시 시국 분위기로 보아 사형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 회복을 위해 그런 살인을 했다고 평가받아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신군부가 김재규 일행에게 적용한 내란 목적 살인죄는 역사적으로 탄핵당할 수밖에 없는 평가라 할 만하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당시 김재규씨에게 근거가 박약한 내란 목적 혐의를 뒤집어씌웠지만, 실제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에서 10·26 사건을 내란 목적으로 이용하는 교묘한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10·26 사건을 내란 목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마치 김재규의 거사에 연루된 것처럼 꾸며 12·12 하극상 쿠테타를 일으켰다. 또 이듬해 5·17 쿠데타를 주도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1백70여 시민을 학살하고 그 과정에서 김재규 일행을 서둘러 처형하면서 정권을 찬탈했다. 15년 뒤인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전두환씨의 행적은 내란죄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뒤늦게 사면 복권되기에 이르렀다.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평가가 무리하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충성 경쟁에서 밀려난 김재규의 우발적 단순 살인’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 근거로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이 시작될 무렵부터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으로부터 부마 사태 처리 문제 때문에 심한 질책을 들었던 점, 박흥주 박선호 등 부하들에게 대통령을 저격하기 30분 전에야 계획을 털어놓고 경호원을 제압하라고 지시한 점, 사건 직후 중정으로 갈지 육군본부로 갈지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했던 점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해 김재규씨는 재판 과정에서 이미 6개월 전인 1979년 4월에 박대통령을 쏘려고 계획했다가 10월로 미루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 해 4월 궁정동에서 똑같은 대통령 만찬을 벌이면서 육해공 3군 총장을 동시에 초청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10·26 사건 3일 전에는 친척들을 장충동 정보부장 공관에 불러 자기가 평소 써둔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자유민주주의’ 등 붓글씨를 전해주며 훗날 후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재규씨 본인은 사형 전날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10·26 사건이 역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을 것으로 확신했다. “나는 금번 1심,2심,3심 재판을 거쳤지만 또 한 차례 재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변호사도 판사도 필요 없고 하늘이 하는 재판이다. 그야말로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4심에서는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목적했던 바 민주 혁명은 성공했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회복되고 보장된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 이 유언을 남긴 다음날인 5월24일 김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씨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시작되었다. 김재규씨를 추모하고 10·26 재평가 작업에 적극 나선 이들은 대체로 그에 대한 몇달 간의 재판 과정에서 신군부가 감추고자 했던 여러 증거와 증인들을 만났고, 그의 인품과 기백 등을 접하면서 크게 감명받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김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주장이 김씨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재야 민주화 지도자들과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고민했다는 대목이다. 이들은 그 근거로 유신 시절 박대통령의 독재에 맞섰던 장준하 선생과 김대중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등과 김씨 사이에 얽힌 일화를 거론한다. 이들은 또 김씨가 비록 중정부장이었지만 대표적 온건론자로서 박대통령을 설득해 유신체제를 완화하려다 좌절한 나머지 암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믿고 있다.

 
재야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평가 갈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씨 일행에 대한 변론을 맡았던 이돈명 이세중 강신옥 안동일 변호사 등과 함세웅 신부, 이해학 목사, 효림 스님 등 종교계 인사들은 1990년대 초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을 위한 추모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해마다 추모 행사를 열고 각종 세미나와 자료집 발간 등을 통해 김씨 재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다. 추모모임은 김씨 유족과 협의해 2002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 신청서를 냈다. 지난해 말 열린 민주화보상심의위 회의에서는 ‘10·26 사건은 더 많은 자료와 역사적 평가를 요구하므로 심의를 보류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의사 김재규 장군’ 수준의 평가에 대해 아직도 부정적인 국민 여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재야 민주화운동가 출신 사이에서도 평가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각종 고문과 공포 정치, 강압으로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총본산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이던 김씨가 사건 후 유신 독재를 무너뜨리려고 계획적으로 거사했다는 주장이 혼란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분위기에 대해 10·26 재평가를 적극 추진하는 쪽에서는 평가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 자료와 근거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효림 스님은 “우리는 빠른 명예 회복을 바라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본다. 앞으로 김재규 의사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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