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중심적 연구, 왜곡된 이론 양산…‘뒤집기’ 활발
‘수컷 쥐가 올라타면 암컷 쥐는 등을 구부린다.’ 이같은 ‘객관적’ 실험 결과에 의심을 제기하는 과학자는 없었다. 모니카 셀히크리거라는 여성 생물학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70년 한 학회에 발표자로 나선 셀히크리거가 실험 결과를 담은 비디오를 트는 순간 청중은 술렁거렸다. 화면에 잡힌 것은, 우리에 밧줄로 매달린 수컷 쥐였다. 쥐의 성(性) 행동을 연구한 실험에서 이런 상황 설정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과거의 실험은 암컷을 먼저 우리에 넣은 뒤 수컷을 들여보내거나, 우리에 갇힌 수컷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을 준 뒤 암컷을 들여보내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컷은 예외 없이 암컷에게 올라타고, 암컷은 등을 구부렸다. 과학자들은 수컷의 성 행동을 ‘올라타기, 삽입, 사정, 이런 행위들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암컷의 성 행동에는 단지 ‘척주전만’(등을 구부리는 행위)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셀히크리거의 실험에서 암컷은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암컷은 묶여 있는 수컷 주변을 뛰어다니다 수컷에게 돌진하는가 하면 껑충 뛰어오르거나 귀를 움직였다. 암컷 쥐의 성 행동이라면 척주전만을 떠올리던 과학자들에게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제 암컷의 성 행동은 성적인 동기 부여, 탐색, 교미하기 전 성 행동 따위로 다양하게 정의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과학지식사회학 등장으로 변화 ‘물꼬’
과학의 성(性) 차별. 이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보인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에 정치적 냄새가 풀풀 나는 성 차별이라니, 어떤 이들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불순한 저의’를 의심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코 불편부당한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점차 늘고 있다. 구미에서는 이미 60년대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초창기만 해도 과학 성차별에 대한 논의는 ‘여성 과학자는 왜 극소수인가’ 하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았으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끝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고, 그나마 교통 사고로 죽은 남편의 ‘대타’로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된 마리 퀴리의 일생은 과학자를 꿈꾸는 여성들에게 카인의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이같은 관심은 ‘과학도 결국 남성 중심 사회의 시각과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넘어갔다. 여기에는 과학계에 여성이 더 많이 진출해도 과학의 본질과 내용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페미니즘과 과학지식사회학의 등장은 이같은 전환에 한몫을 했다. 토마스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를 발표한 이래 구미 사회에서는 자연과학의 객관성·보편성·가치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벗겨내는 작업이 활발했다. 과학 또한 특정한 사회문화·정치적 맥락에 영향을 받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성역 허물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윤정로 교수는 과학기술 내용에 영향을 미친 남성 중심성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연구 주제를 선택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 나타나는 남성 중심성이다. 암컷의 성 행동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았던 앞서의 실험이 대표적인 예이다.
두 번째는, 실험 디자인에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선입견이다. 동물 실험이나 심리학 연구 대다수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자료로 이루어진다.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의 저자인 사회심리학자 캐럴 타브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라는 종(種)을 대표하는 것은 ‘70㎏짜리 남자’인 것이다(이는 미국 의과대학에서 다루는 표준 환자이기도 하다). 왜 다이어트를 하느냐고 물으면 많은 여성들은 건강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지방이 위험하다는 경고는 상당 부분 남성을 표준으로 삼은 데서 나왔다는 것이 윌리엄 버넷과 조엘 거린의 연구 결과이다.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허벅지·엉덩이·옆구리에 지방을 저장하게 되어 있다. 이 잉여 지방분은 월경·임신·수유에 필요하며, 폐경 이후에는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 생산과 축적을 위해 필요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마른 여성, 또는 다이어트를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여성은 골다공증에 걸릴 위험이 높다. 그런데도 ‘비만 때문에 더 큰 장애를 겪는 것은 남성인데,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여성’인 엉뚱한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실험 결과와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에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편견이다. 몇 달 전 국내 한 일간지에는 ‘펭귄 암컷도 몸 판다’는 제목으로, 영국 동물행동학 연구 사례를 소개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펭귄 암컷이 새끼를 치려면 반듯한 돌이 많이 필요한데, 암컷이 돌을 다듬기보다 이웃한 수컷 펭귄에게 ‘매춘’을 하고 반듯한 돌을 얻어 온다는 것이 이 기사의 요지였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 판단·일상 언어가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 하정옥씨(서울대 박사 과정·과학사)의 비판이다. 펭귄의 특정 행동을 매춘이라고 규정하는 과정에는 이미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매춘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암컷의 ‘바람기’는 70년대 이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우두머리를 떠나 다른 수컷 무리를 기웃거리는 암컷’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힘센 수컷 우두머리가 암컷들을 ‘거느리며’, 우두머리만이 암컷과 짝짓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때까지의 정설이었다.
암수 짝짓기에 얽힌 ‘차별의 사슬’
그런데 조류를 연구하던 한 학자가 어느 날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찌르레기 무리의 수컷 우두머리에게 정관 절제 수술을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다수 암컷이 임신을 했다. 어떤 학자들은 암말이 낳은 야생마의 DNA를 검사했다. 그 결과 종마의 새끼를 낳은 암말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암말들은 다른 야생마 무리에 접근해 수컷들과 짝짓기를 한 뒤 새끼를 낳은 것으로 밝혀졌다(<뉴스위크> 99년 6월23일자). 뿐만 아니다. 민물고기 암컷은 배란 때가 아닌데도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한다. 영장류 학자들이 ‘일부종사’한다고 믿었던 비단털원숭이 암컷은 야생 상태를 오래 관찰한 결과 여러 수컷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밝혀졌다.‘(인간을 제외한) 암컷은 발정기에만 짝짓기를 한다’는 고정 관념마저 뒤집으면서, 때도 상대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는 이들 암컷의 존재는 새로운 가설들을 등장시켰다. 가장 건강한 정자를 얻어 확실하게 임신할 수 있게끔 암컷이 많은 수컷을 필요로 한다는 ‘임신 가능성 보장’ 가설, 우두머리의 묵인 아래 암컷이 낮은 지위의 수컷을 유혹함으로써 나약한 수컷이 무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묶어두기’ 가설 따위가 그것이다.
누가 아버지인지 불확실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암컷이 여러 수컷을 상대한다는 ‘조종’ 가설도 나왔다. 그 결과 수컷들은 암컷 새끼를 좀더 잘 돌보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니며 먹이를 나누어 주는 아메리카원숭이 수컷처럼 ‘부성애’가 강한 동물이 종종 발견된다. 조종 가설에 따른다면 암컷의 바람기는 ‘고도의 정치적 책략’으로 둔갑한다. 진화생물학자 홀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암컷은 좀더 정치적이고 수컷은 좀더 양육적인 것으로 이해가 뒤바뀌는 것이다.
과학의 성 차별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과학을 지배하는 현실이 이런 왜곡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암컷의 성 행동 연구에서 드러나듯 과학계에 새로 등장한 여성들은 기존 사회생물학의 전제를 일정 부분 뒤엎는 데 성공했다. 데스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로 한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사회생물학은 성차의 기원을 생물학적 진화에서 찾는다. 이때 핵심적인 개념이 ‘성 선택’인데, 이는 무수한 수컷 가운데 가장 우월한 수컷만이 짝짓기에 선택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종족 보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컷은 공격적·지배적, 암컷은 수동적·종속적인 속성을 갖게 되었다고 사회생물학자들은 설명한다.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인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성의 공격적 지배 본능과 여성의 모성 본능은 이같은 속성에 기반을 둔 인간 사회의 성별 분업이라는 것이 사회생물학자들의 믿음이다.
여성 과학자들의 등장은 이같은 믿음을 무너뜨렸다. 사회생물학뿐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에 대한 탐구>에서 월경을 ‘질병’으로 묘사한 이래 의사들은 월경을 병적인 현상으로 여겨 왔다. 과도한 두뇌 활동이 월경 불순·무월경을 일으켜 여성의 ‘본분’인 임신과 출산을 방해하므로 월경 중인 여성은 지적인 활동을 피하고 누워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 19세기 의사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이에 대항해 월경이 정상적인 생리 현상임을 밝혀내고 이 기간에 가벼운 운동과 일상 활동을 권장하는 새로운 의학 이론을 만들어 낸 것은 영국 여의사협회 크리스틴 머렐 같은 여의사들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두개골이 크기 때문에 지능이 더 우수하다는 19세기 골상학의 뿌리 깊은 이론을 부숴 버린 사람도 알리스 리라는 영국의 여성 과학자였다(가제목 <페미니즘으로 본 과학·기술·의료> 창작과비평사 출간 예정). 정자와 난자의 뿌리 깊은 정설도 뒤집혀
나아가 여성 과학자는 ‘남성과 다르게 보고 생각하기’로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다. 제인 구돌은 실험실을 떠나 밀림으로 직접 들어간 최초의 영장류 연구 학자였다. 침팬지와 함께 살며 이들을 관찰한 구돌은 이들도 도구를 사용하며, 자기 새끼 아닌 고아를 입양해 키우는 등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40년대 미국의 생물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은 옥수수의 잡색 현상(옥수수 낟알에 다른 색깔을 가진 낟알이 종종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다가 ‘점핑 유전자’를 발견했다. 본래 있던 염색체에서 다른 염색체로 자리를 옮겨다니는, 이 놀라운 유전자를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유기체와의 교감’을 강조한 그만의 철학이 있었다.
그는 유기체인 옥수수를 뜯어 보고 조작하기보다 옥수수와 교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여성인 그는 ‘여성’을 상징하는 자연에 ‘남성’인 이성이 공격적으로 침투하는 방식의 기존 과학 방법론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의 새로운 가설을 동료 과학자들은 이단이라고 받아넘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뒤인 83년 스웨덴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 의학·생리학 상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정자와 난자에 대한 뿌리 깊은 정설을 뒤집은 것도 여성 과학자였다. ‘활동적이고 힘 있는’ 영웅적인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잠자는 미녀’처럼 대기하고 있는 것이 난자의 전통적인 역할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여성 학자들은 난자가 오히려 정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정자가 난자막을 통과하려면 단백질 분자가 필요한데, 이를 만들어내게끔 화학적 명령을 급파하는 것이 난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95년 크리스티앙 뉘스라인-폴하르트는 수정이 일어나기 전 난자 세포질 구조의 중요성을 밝힘으로써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표준 유전학, 돌연변이 유발원 등은 이미 밝혀져 있었던 만큼, 이 연구는 누군가 아이디어만 있었다면 40년 전에도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유전학자 애쉬버너의 지적이다. 결국 문제는 발상의 전환이었던 셈이다.
물론 비판은 있다. 과학에 페미니즘 비판을 도입하는 것은 아직까지 심리학·영장류학·의학·생물학 따위 ‘부드러운’(소프트) 과학에 집중되어 있다. 물리학 같은 ‘단단한’(하드) 과학에는 제대로 손을 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비판자들은 ‘f=ma라는 공식의 성 차별성을 밝혀 보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이분법으로 과학의 정치성을 숨겨온 기존 논리를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하정옥씨의 비판이다.
과학에 숨겨진 성 차별을 폭로하는 세계적인 추세에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6월19일 춘계 학술대회를 연 한국여성학회는 21세기 여성주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한국에서의 과학기술, 여성, 젠더’를 선정했다. 한국물리학회(회장 민석기)가 발행하는 월간지 <물리학과 첨단 기술>은 지난 3월호에서 ‘여성과 과학’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7월 말께면 국내에서 처음 ‘여성과 과학’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개설서 <페미니즘으로 본 과학·기술·의료>가 나온다.
‘여성 과학자는 왜 극소수인가’라는, 구미 사회 논쟁의 출발점을 이제 막 밟은 수준이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초보적이나마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도 막 시작되고 있다. 지난해 월간 <말>에서는 반짝 지상 논쟁이 벌어졌다. 98년 1∼4월 과학 평론가 이인식씨가 <말>에 연재한 과학 칼럼을 문제 삼아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여성인권모임이 반박문을 기고한 것이었다.한국 여성 과학자들, 차별 이데올로기 깨기 ‘걸음마’
‘과학이라는 이름의 성 차별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화여대생들은 성에 대한 이인식씨의 관점이 성 차별을 깔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자신이 학문적 태도를 포기한 적이 없는데도 대학원생들이 자기 글을 학술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주관적·공격적으로 속단하는 태도를 보였다며 98년 5월로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
최근 발행한 <여성과 사회> 제10호에서 서소영씨(시립대 강사·과학사)는 이인식씨에 대해 제2탄을 날렸다(‘페미니스트 과학 평론가를 기다리며’). 서씨는 이씨의 글이 △과학 용어·지식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과학=사실=진리’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을 현혹하고 △남성 중심적이며 교묘하게 여성을 비하하는 방식으로 남녀 성차를 표현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이씨 칼럼에는 ‘어머니가 주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집안에서는 딸을 아내 대역으로 보기 때문에 부녀상간이 자주 일어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는 남성 성욕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성 차별적 전제를 깔고 있으며, 그 결과 이씨는 남편 성욕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 아내에게 근친상간이 일어난 책임을 전가하는 오류를 낳았다는 것이 이들의 비판이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수학을 못한다’‘여자가 무슨 공대냐’라는 사고가 엄존하는 한국 사회에서‘페미니즘이 과연 과학을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을 키우고, 곳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시급하다는 것이 <페미니즘으로 본 과학·기술·의료> 집필에 참여한 홍성욱씨(토론토 대학 조교수·과학기술사)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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