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재·정창모 등의 삶과 작품 세계
  • 김은남·고제규·고재열 기자 ()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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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재·정창모 등 북에서 오는 예술인의 삶과 작품 세계
이기영 정지용 한설야 정종여 최승희. 대부분 귀에 친숙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정창모 리석호 정서촌 오영재는? 아는 이가 거의 없다. 북한에서 1급 대우를 받는 작가·예술가인데도 그러하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가 한국전쟁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른 것이다.

인민 예술가·공훈 배우가 우리 곁에 온다. 지난 7월16일 북한 적십자회가 통보한 이산가족 방문단 후보 명단에는 문화예술계 인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방문 성사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 전후(戰後) 세대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미리 들여다본다.

먼저 명단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이 계관 시인 오영재씨(66)와 조선화의 거장 정창모씨(70)이다. 오영재씨는 북한 문단의 세대 교체를 이루어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평양에서 발행되는 <조선문학>은 그를 명실상부한 ‘최고 시인’으로 일컫고 있다.

국학자료원이 펴낸 <북한문학사전>(1995년)에 따르면, 오씨는 1935년 11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전남 함평과 강진에서 국민학교·중학교 과정을 거쳤다. 전쟁이 나던 해 열여섯 살 나이로 인민의용군에 입대하기까지 그는 특별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듯하다. 1990년 <통일예술>에 발표한 자전 수필 <나의 발자욱>에 따르면 오씨는 ‘어린 시절 특별히 문학에 뜻을 두어본 적도 없고 사랑채에 굴러다니는 소설책들을 흥미 삼아 주워 읽은 것밖에 없다.’
송가 서사시로 두각 나타낸 오영재

그런 그가 문학에 눈을 뜬 것은 전쟁터에서였다. 중대마다 보급되는 <전선문고>에 실린 박세영 조기철 민병균 김조규의 시를 읽으며 비로소 창작 의욕을 느꼈다고 그는 고백했다. 전쟁이 끝난 뒤 외톨박이로 북한에 남게 된 그는 작가학원에 입학했고, 이곳을 다니는 동안 첫 작품 <갱도는 깊어간다>(1953년)를 발표했다.

천리마 운동이 본격화한 1960년대 북한 문단에서는 대폭적인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임 화 김남천 이원조 설정식 이태준 등 남로당 계열 문인이 대거 숙청됨과 동시에 전후(戰後) 등장한 시인이 시단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오영재씨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그가 지은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1961년)에는 조국 재건을 위해 땀 흘리는 ‘천리마 시대 인민 대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녹아 있다.

‘사랑스런 처녀야! / 조국은 무던히도 귀중한 그 무엇인가를 많이도 주고 싶다. // 중략 //수령님의 위대한 구상을 조국은 안고 / 어느 농기계 중대의 창안자와도 밤을 밝히며 / 겨우내 벗지 않은 너의 누빈 솜저고리와 / 무지개빛 머리수건을 생각한다 / 아름답다. 조국이 사랑하는 처녀는 아름다워라 //’

그가 북한 시단에서 결정적으로 주목된 것은 1985년 장편 서사시 <대동강>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는 유일 주체사상이 뿌리를 내리면서, 김일성과 당에 대한 찬양과 충성을 맹세하는 이른바 ‘송가(頌歌) 서사시’가 북한 문학의 주류로 자리를 잡은 시점이었다. 권영민 교수(서울대·국문학)에 따르면, 오씨는 송가 서사시로 인해 두각을 나타낸 시인이다.

‘정답고 사랑스러운 것이 / 너무도 가까이에 있어 / 내 미처 그 귀중함을 느끼지 못했구나’라는 자탄과 함께 대동강 상류의 발원지에서 하류의 남포 갑문에 이르는 긴 여정을 시작한 시인은, 여행 중 만난 사람과 사건을 노래하면서 ‘전인민적인 시대적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새 인간학상의 형상화’를 꾀한다.

시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김일성상을 수상한 오씨는 1990년 들어 김정일을 찬양하는 작업에도 앞장섰다. 그가 1992년 발표한 <인민의 아들>은 김정일에 대한 송가로, 여기에서 김정일은 ‘이 세상에 빛을 주고 / 만물에 생을 주며 / 품에 안아 키워 주는’ 태양으로 묘사된다. 오늘날 그는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북의 문예 철학이 엄연히 다른 만큼 우리쪽 시각에서 북한 시의 갈등 구조 내지 시인의 개성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다. 단지 통일을 염원하며 지은 몇몇 시에서 오씨에게 못박힌 이산의 아픔이 언뜻 감지될 뿐이다. 그에게 분단의 세월은 ‘못가는 고향을 두고 가슴 태우며 / 사나이들의 눈에 소리업시 피가 맺히는 밤들(<복수자의 선언>)’이며, 어느 봄날 몇 잔 술에 자제력을 잃고 ‘만경봉의 푸른 잔디밭에 뒹굴며 두고 온 어머니를 찾으며 아이처럼 울’어야 했던 세월이다(<나의 발자욱>). 힘과 정서를 겸비한 조선화의 대가 정창모

이번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또 한 사람의 거물급 예술가인 정창모씨는 1988년 북한 예술가 최고의 영예라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금수산의사당 기념 촬영대에 걸려 있는 <비봉 폭포의 가을>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조선예술> 2000년 3월호는 그를 ‘인민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힘과 정서를 다같이 겸비한 특색 있는 얼굴을 가진 미술가’라고 소개했다.

1931년 12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정씨는 전주북중(현재 전주고)에 다니다가 인민의용군으로 입대해 월북했다. 정씨 또한 어린 시절에는 미술과 별 인연이 없었던 듯하다. 전주북중 동기동창인 정인무씨(68·제28회 졸업)는 그를 ‘굉장한 선동가’로 기억할 뿐 그림에 소질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전주북중 성적표를 보아도 정씨의 미술 성적은 2학년 때 70점, 3학년 때 85점 수준이었다.

그러나 1963년 평양미술대학 전문부와 조선화학부를 졸업한 뒤로 그는 조선화 <배머리에 오신 수령님>으로 ‘재능 있고 전도 유망한 신진 미술가’ 대열에 올랐다. 이어 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하던 1965년에 그린 <북만의 봄>으로 국가미술전람회에 입상하면서 그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그림 참조).

이른바 ‘주체 미술 전성기’인 1970년대 들어 정씨는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풍경화실장을 맡았다. 이 시기는 이미 조선화를 수묵에서 채색화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1965년)가 확립된 시기이다. 이는 ‘진정한 채색화는 주로 몰골이다’라는 교시로 발전했다.

선묘로 형태를 그린 다음 그 가운데를 채색하는 구륵(鉤勒)법과 달리 몰골(沒骨)법은 윤곽선을 그리고 않고 먹이나 채색을 찍어 한 붓에 그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몰골법을 조선화의 정통 기법으로 교시한 것이다. 정씨는 몰골법의 대가로 손꼽혔다. 그가 이 기법으로 그린 <금강산> <진주담의 가을> <비선폭포> 등은 ‘실로 조용하면서도 힘이 느껴지고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시적인 정서가 흐른다’(<조선예술>)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예술>에 따르면 그는 인물화·풍경화·화조(花鳥)화·정물화 등 조선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금까지 무려 3천여 점을 그렸다. 여기에는 <분계선의 옛집터>를 비롯한 통일 염원 3부작도 들어 있다. 올해 칠순을 맞은 이 화가는 한 수기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저에게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른 미술가라고 하지만 저는 하나의 작은 령마루를 넘어선 데 불과합니다.’‘최승희’를 꿈꾸던 율동학 박사 김옥배

이밖에 북측 명단에 오른 유명 문화 예술계 인사로는 김옥배(68)·김점순(68) 씨를 꼽을 수 있다. 북한 예술계가 배출한 여성 박사 1호인 김옥배씨는 현재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이며 ‘인민 보건 율동’(보건 체조)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7월10일 조선중앙텔레비전에 출연한 박영석 교수(평양음악무용대 음악무용연구소장)는 인민 보건 율동이 어린이의 발육을 조화롭게 할 뿐더러 예술인·체육인의 유연성을 제고시켰다며, 인체 율동의 이론화·체계화를 이룩한 과학자라고 그를 치켜세웠다. 그의 여동생인 김숙배씨(65)는 무용가 최승희씨와 한 동네(가회동)에 살던 시절, 최씨가 춤추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언니가 ‘나도 저렇게 춤추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현재 북한 국립민족예술단 성악 지도원이자 고음(소프라노) 독창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김점순씨는 서울 중앙여중 재학 시절 전쟁이 터지자 조선인민군협주단에 뽑혀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보> 최근호는 김씨가 전쟁 직후 북한의 첫 가극인 <콩쥐팥쥐>에서 주인공을 맡은 것을 비롯해 <온달과 공주> <밝은 태양 아래서> 등 수많은 가극에 출연하며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북한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신영철씨의 아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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