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국역 근역서화징>
  • 배병삼 (성심외국어대 교수·한국 정치사상) ()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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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고로 이룬 ‘온고지신’국학계 60년 만의 쾌거
한국 서화사 2천년을 기다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 나왔다면, 올해는 60년을 더 기다려 그 국역판이 나온 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세창(吳世昌) 선생이 계명구락부에서 출간한 것이 1928년의 일이었으니….

워낙 이 책은 신라·고려·조선의 역대 서화가들을 낱낱이 찾아 그 기록과 논평뿐만 아니라 작품명과 소재까지 기록한 것이다. 이에 수록된 인명의 수가 1천1백17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편찬자(오세창)는 자신의 품평을 되도록 피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사전적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서예가 김응현이 지적했듯이 ‘역대의 서화가를 평가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헌으로 한국 서화가 연구의 기본서였으며 광복 이후 출간된 <한국서화인명사전> 등은 모두 이 책을 인용할’ 정도였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60년 동안 이 땅이 겪은 변화의 폭은 너무나 자심하여, 차라리 2천년 세월에 맞먹을 형편이다. 이리하여 오늘날, 이 땅에 서화가 있었고 또 그 길잡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자(漢字)라는 문지방에 걸려 서화의 맥을 갈래잡고자 했던 많은 학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리게 했던 터다.

이 단절을 잇고 또 그 갈증을 축일 수 있는 대사(大事)가 올해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국역 근역서화징>인 바, 이는 60년래의 쾌사(快事)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책은 번역서이기를 벗어나 있다. 만일 이 책이 한자(漢字)를 한글로 옮겨낸 데 그쳤다면, 그것은 한낱 학술서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이 국학계의 쾌사인 이유는 이 땅의 지난 60년간 학문적 발전이 개입되어 있고 나아가 원문의 착오까지도 낱낱이 교정해낸 ‘새 책’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두 종의 <근역서화징>을 얻게 된 셈이다. 하나는 1928년의 것이요, 또 하나는 1998년의 국역본인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이 올해의 한국학 도서로 첫손에 꼽힌 참된 까닭이다.

이 국역 작업은 한학(漢學)의 대가인 홍찬유(洪贊裕)옹이 중심이 되고, 그 곁에 신진 학자들이 함께 참여해 우선 노소의 융합을 이룬 것이 큰 특징이다. 또 전통 서화에 대한 접근에 문·사·철을 아우르는 포괄적 지식이 요구된다고 볼 때, 이 번역 작업에 문학·미술·역사·철학 등 각 분야의 신진 기예들이 두루 참여한 것이 또 하나의 특기점이다.

본문의 글자(漢字) 하나하나에 대해 치밀하고 차분한 번역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세밀한 ‘번역자 주’가 따끔따끔하게 각주로 처리되어, 전통 문화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미덕은 실로 한국학 도서 번역을 위한 한 범전을 수립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 한국학은 더 깊은 번역 사업에 주력해야 할 것인 바, <국역 근역서화징>이 보여준 미덕들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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