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바꾼 ‘슈피겔 사건’
  • 베를린·金鎭雄 통신원 ()
  • 승인 1996.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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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정책 비판에 정부 강경 대응…법원, 언론 자유에 판정승
1644년 영국의 존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라는 글에서 당시 모든 출판물에 실시되던 국가 검열을 거부하고 언론 자유를 최초로 부르짖은 이후, 18세기에는 미국·프랑스에서 언론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독일은 이보다 늦은 19세기 중반(1848년 혁명) 이후 언론 자유가 신장될 기회가 주어졌으나, 1차대전과 나치 독재를 거치면서 언론은 정치 도구로 철저히 길들여졌다.

2차대전 이후 서독을 신탁통치한 연합국의 주요 과업 중 하나는 민주 언론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 제도를 본따 도입한 공영 방송 ‘ARD’와 미국 <타임>을 모방해 탄생한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전파·인쇄 매체 분야에서 각각 대표적인 민주 언론으로 성장해 독일이 민주 국가로 재탄생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슈피겔>은 독특한 논조와 날카로운 안목으로 정치·경제·사회 분야 전반에 내재한 문제점들을 심층 보도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 다른 언론 매체들조차 경쟁적으로 <슈피겔>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는 사례를 독일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다. 그것도 발행(매주 월요일)이 되기 전부터 말이다.

언론인 구속하자 시위·항의 성명 줄이어

이와 같이 ‘언론 위의 언론’으로까지 기능하는 <슈피겔>의 신화는 60년대에 터진 이른바 <슈피겔> 사건을 계기로 굳어졌다. 그 발단은 62년 10월 10일자 <슈피겔>에 실린 ‘제한된 방어 태세’라는 기사였다. ‘펠랙스 62’라는 이름으로 그해 가을에 실시된 나토와 독일군의 대규모 합동 군사작전을 예리하게 분석한 이 기사는 독일 국방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늘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데 앞장서 온 <슈피겔>로서는 이 기사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일이 지난 10월27일, <슈피겔>은 검찰의 기습 공격에 쑥밭이 되었다. 함부르크와 본에 있는 <슈피겔> 사옥에 난입한 무장 경찰은 수많은 자료를 압수하고 회사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발행인 아우그스타인과 수많은 기자가 체포되었다.

그 날 검찰이 발표한 기록에 따르면, <슈피겔>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대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보도해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관련 언론인은 국가모독죄 및 허위보도죄와 뇌물증여죄가 적용되어 긴급 구속되었다. 전후 최대 필화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는 동시 다발로 폭발했다. 학생과 시민의 가두 시위, 국내외 사회단체들의 항의 성명, 다른 언론 매체들의 날카로운 비난이 줄줄이 이어졌다. 미국·영국 등 외국 언론까지 사설을 통해 독일 정부의 언론 자유 침해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프란츠 요셉 스트라우스 국방장관은 자신의 개입설을 부인하다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도 안된 그 해 12월 결국 쫓겨났다.

국가 안보를 내세운 정치 권력과 자유 수호로 맞선 한 언론과의 긴장 관계는 수년간 지속되었다. 1백9일간 발행인이 수감되고 한 달 이상 경찰이 회사에 상주하는 상태에서 검열을 거쳐야만 <슈피겔>을 발행할 수 있었다. ‘언론 자유냐 국가 모독이냐’라는 주제로 장기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슈피겔> 사건은 65년 5월13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피소된 발행인과 편집인에 대한 재판을 기각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슈피겔>측은 ‘독일 검찰 총수가 사인한 사건을 법원이 거부하기는 역사상 처음’이라고 평했다.

이듬해 헌법재판소는 <슈피겔>이 신청한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에서 ‘공권력에 의해 구속되거나 검열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언론은 자유 민주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라고 유권 해석을 내려 언론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재확인했다.

이 사건으로 49년부터 독일을 이끌어 온 아데나워 총리는 63년 에르하르트에게 총리 직을 넘겨 주었다. 나아가 60년대 말에는 정권이 기민당에서 자민당으로 넘어가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사건이 끝난 뒤 <국가 모독과 언론 자유> <슈피겔 사건> <프란츠 요셉 스트라우스의 슈피겔 사건> <언론에 대한 헌법의 위임성> <공화국의 스캔들> 등 수많은 단행본이 <슈피겔> 사건을 다루었다. <슈피겔> 사건 이후 기능이 더욱 확대된 독일 언론은, 국민의 지팡이로서 지배 권력을 감시하고 성역 없이 문제점을 공론화해 여론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독일 헌법은 언론 자유의 수혜자가 정부나 매체(혹은 기자)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개개인은 대부분 이를 언론 매체를 통해 향유한다. 따라서 국민의 언론 자유는 우선 매체의 언론 자유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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