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영화 서클 얄라셩의 변신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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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대학 영화 서클…다양한 창작 통해 ‘정체성’ 모색
올해 서울대 영화 동아리 ‘얄라셩’이 〈16년 만의 외출〉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창작 영화제의 자료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최초의 대학 영화 서클이라는 수식어, 현재 감독으로 활동하는 선배님들의 이름, 서울영화집단과 노동자뉴스제작단, 아직도 룸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수많은 집회 기록들. 이 모든 것이 얄라셩의 이름에 끊임없이, 그러나 언제나 희미하고 석연치 않게 존재하는 과거의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들을 밝은 빛으로 끄집어내어 제 자리를 찾게 하고 싶다.’(얄라셩 97학번 이진행군의 〈얄라셩;1980-1998〉에서)

얄라셩이 걸어온 18년 역사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가 감당하기에 벅찬 격동의 세월이었다. 그 세월이 남긴 것들이 실체 모를 ‘유령’처럼 느껴질 정도로, 98년을 살아가는 젊은이가 짊어져야 하는 시대적 괴리감은 크다.

세계적으로는 소련과 동유럽권 체제의 몰락, 국내적으로는 군사 정권의 퇴진. 90년대의 막은 그렇게 올랐다. 돌과 화염병이 사라지면서 젊은 영화인들의 카메라 앵글도 초점을 상실했다.

김홍준 박광수 홍기선 황규덕 송능한 등 얄라셩을 결성한 76∼79학번들은 이제 한국 영화계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개인 차원의 8㎜ 영화 창작에 몰두하던 그들과 후배들의 유대는, 2년 뒤에 등장하는 ‘영화는 혁명의 무기’라는 후배들의 선언과 함께 대부분 단절되었다.

그 뒤 9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치열한 이념 논쟁과 현장 활동, 집회와 시위의 격랑 속에서 얄라셩 회원들의 영화 운동은 필름보다는 활자, 카메라보다는 유인물을 통해서 펼쳐졌다.

그러나 세계적 변혁의 파고에 휩쓸리면서 얄라셩의 영화 운동은 ‘독립 영화’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한 채 좌초했다. 본래 창작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던 얄라셩이지만 영화라는 성과물로 전통을 이어 가지 못했기에 전설처럼 허무한 명성만 남겼다. 얄라셩 대표 이두희군(자연과학부 97학번)에 따르면, 몇 안되는 80년대의 작품들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념의 푯대가 쓰러지자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90년대 얄라셩 회원들의 시대 정신. 그래서 지금은 비록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지만, 스스로 해답을 풀어야 할 통과 의례로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인다면 이들의 앞날은 선배들의 그것보다 결코 어둡지 않다.

이론에 얽매이기보다 적극적인 창작 활동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이병일군(조선공학과 94학번)의 솔직함, 교사를 직업으로 지망하면서도 개인적으로 16㎜ 다큐멘터리 촬영 작업을 펼칠 생각인 김기현군(물리교육과 92학번)의 내실. 두 젊은 학도만 보아도 나름으로 90년대 말을 부대끼며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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