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에게 내 젊은 영혼 바친다”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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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죽음·악령·얼룩진 음악·영화·인터넷에 신세대 탐닉…“무분별한 서구 문화 추종” 비판도
성과 폭력이 일상화한 우리 사회의 어둠에서 자라난 이른바 ‘악마주의’가 세기 말을 맞아 밝은 세계로 나오고 있다. 악마주의는 몇해 전부터 대중 예술 매체를 통해 전세계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 사이에 일정한 세를 이루며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음악·소설·인터넷을 통해 거침없이 밀려오는 외국 문화 가운데 악마주의 문화 행태가 답답한 현실에 싫증 난 젊은이들 사이에 하위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악마주의가 번지고 있는 문화 현장을 찾아 우리 젊은이들이 악마주의 문화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즐기는지 알아 보았다. <편집자>

지난 8월16일 오후 8시30분 서울 경희대 정문 앞에 있는 메탈 카페 ‘헬’(지옥).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헤비 메탈 공연이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담배 연기로 가득찬 20평 남짓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찬 젊은이 백여 명이 고막이 터질듯이 울리는 기타와 드럼 소리에 맞춰 고개를 앞뒤로 빠르게 흔들고 있었다. 록그룹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헤드 뱅잉(head banging·머리 흔들기)이었다.

무대에서는 국내 헤비 메탈 밴드인 오프(off)가 미국의 전설적인 악마주의 밴드 디어사이드의 <기독교인을 죽여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너희(기독교인)는 우리가 경멸하는 유일한 족속이다. 나는 너희들의 죽음을 보고 싶다. 너희들은 곧 죽을 것이다. 위선에 빠져 있는 너희들은 신앙을 설사하고 도덕적으로 병들어 몸이 뭉개지고 칼에 찔려 내팽개쳐질 것이다.’ 오프의 리더이자 보컬인 곽인호씨는 신과 기독교인을 저주하는 가사를 마치 성대를 긁어내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로 뱉어냈다. 청중은 검지와 새끼 손가락을 펴거나 헤드 뱅잉을 하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헬을 즐겨찾는다는 한 사람은 “몸 전체로 듣는 짜릿한 기분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다”라고 말했다. 헬처럼 헤비 메탈만 전문으로 공연하는 소규모 클럽은 서울에만 20여 개가 된다. 보통 공연은 주말에 잡혀 있는데, 공연이 열리는 날은 젊은이들로 꽉 찬다. 오프 같은 소규모 클럽을 전전하는 헤비 메탈 전문 밴드는 백여 개가 넘는다. 주로 국내 록 음악의 발상지인 인천이나 언더그라운드 음악 문화가 발달한 안양과 부산 지역에 헤비 메탈 밴드가 많다.

메탈 카페에서 주로 연주되는 음악은 헤비 메탈 가운데서도 사운드가 파괴적이고 가사 내용이 죽음·신성 모독·악령 숭배같이 기괴한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서 좀더 극단화한 것이 데스 메탈(죽음의 헤비 메탈)이다. 데스 메탈 밴드는 사운드와 가사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반사로부터 앨범 제작을 거절당하기 일쑤여서 음반을 출시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국내 헤비 메탈 밴드는 소규모 클럽을 돌아다니며 팬들과 직접 만나고 있다. 공연마다 20, 30대가 주류인 청중이 클럽을 가득 메운다. 때로는 라이브 공연장을 빌려 메탈 전문 공연을 하기도 한다.

지난 8월16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라이브1관에서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헤비 메탈 공연이 있었다. 무대가 크고 사운드를 높일 수 있어 청중이 많이 입장했다. 하지만 규모만 클 뿐 공연장 분위기는 소규모 클럽과 비슷했다. 이 공연을 주최한 단체는 PC 통신 나우누리의 헤비 메탈 동호회 메탈체인(시솝 이준학)이었다. 데스 메탈 마니아들은 그들만의 음악 정보를 공유할 장소를 가상 공간에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기성 세대가 침범할 수 없는 가상 공간만이 그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통해 ‘악마 메시지’ 직접 수용

젊은이들은 가상 공간에서 그들의 음악만을 즐기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사회가 금기시하는 모든 가치와 신념을 해방하는 공간으로 가상 공간을 선택했다. 그러니 악마와 공포라는 주제를 비켜갈 리가 없다. 그들은 반(反)이성에 근거를 둔 공포와 신비주의를 만끽하기 위해 PC 통신망에 공포와 신비주의 방을 마련했다. 천리안에 접속해 ‘go horror’를 입력하면 공포·악마·신비주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반이성의 방은 회원제로 운영된다. 회원들은 악마와 미확인 비행물체(UFO)처럼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자기 생각과 경험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논할 수 있는 반이성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신세대는 좀더 강렬하고 명쾌한 답변을 찾아 가상 공간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이들에게 인터넷은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통로이다. 신세대는 인터넷에서 강렬하고 자극적인 메시지를 찾는다.

악마를 숭배하는 교파가 주창하는 악마 찬양과 ‘외계인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수천 개가 넘는 악마주의 관련 사이트를 찾을 수 있다. 신세대는 악마교 홈페이지(82쪽 상자 기사 참조)를 통해 지금까지 절대선이었던 모든 가치가 일거에 부정되는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악마주의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는 없다. 악마교는 악령 숭배·살인·섹스를 자유롭게 탐닉하기를 주장하며, 모든 신성한 가치를 부수고 새로운 가치(악의 가치)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국내에 들여오지 못하거나 아직 들어오지 않은 악마주의 음악도 인터넷을 통해 내려 받아 리얼 오디어 같은 음성 재생 프로그램에 넣으면 그 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

통신망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악마주의 경향은 구체적인 일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외국인 액세서리 노점상이 들여오기 시작한 해골이나 악마 모습을 한 금속 액세서리는 얼마 전부터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콜롬비아에서 온 액세서리 노점상 베티씨는 “한국에서 악마나 해골, 또는 뱀으로 장식된 금속 장신구가 잘 팔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악마 모양 장신구가 인기를 끌자 국내 액세서리 상인들도 기괴한 모양 일색인 금속 장신구를 취급하고 있다.
‘공포 체험 카페’ 문전성시

좀더 강렬한 자극을 바라는 신세대들은 장신구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공포 체험 모임이나 행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지하철 강남역 근처에 있는 ‘고스트 캐슬’이라는 카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되는 각종 장치를 마련해 공포를 즐기려는 젊은 고객을 유인한다. 일정 시간 또는 예고 없이 벌어지는 공포 쇼가 시작되면, 벽에 걸린 여자 초상화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피아노가 저절로 연주되는가 하면 문이 닫혔다 열렸다 한다. 카페 조명은 어두워지고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벽에 걸린 악마가 눈을 뜬다. 비명을 지르는 손님도 있지만, 이 카페를 찾는 고객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석환 사장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비주의나 악마주의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해 4월 개장했는데 그것이 맞아떨어졌다”라고 말했다. 정사장은 지난달 순이익을 3천5백만원이나 보았다고 한다.

지난 6월13일 금요일에 케이블 TV 영화 전문 채널 캐치원은 공포 체험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를 기획한 송 혁 과장은 “공포 마니아들이 이 행사에 참여한 동기는 단순히 더운 날씨를 서늘하게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마성을 확인하고 실행하고 싶어서이다”라고 말했다. 송과장은 이 행사에 참가하겠다고 신청한 이가 7백80여 명이나 되었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악마와 공포에 대한 호기심이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강해 악마주의 성향을 띤다고 덧붙였다. 이 행사 포스터만 보고도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는 참가자 주석환씨는 “어차피 존재하는 악마성을 무조건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분장을 통해)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행하는 악마주의는 그 뿌리가 깊어 세기 말마다 위력을 발휘한다. ‘악의 전령사’라고 불린 19세기 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가 기원이라는 구미의 악마주의는 현대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공개적으로 악마주의를 행동 강령으로 삼는 밴드가 활동하는가 하면, 이들의 음반이 앨범 순위에서 상위에 오르기도 한다. 또 공동 묘지나 폐허가 된 공장에서 밤을 새며 악마를 참배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젊은 세대는 악마주의에 어느 정도 심취하고 있을까. 종교계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악마주의에 물들어 살인·악령 숭배·신성 모독을 찬양하는 문화에 빠져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종교계가 아니더라도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청소년들의 끔찍한 범죄와 타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아무 제약 없이 스며들어 오는 서양의 악마주의 문화에 노출되어 인성이 왜곡되고 폭력성이 증가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악마주의로 분류되는 대중 예술 장르를 즐기는 신세대들은 이러한 기성 세대의 우려를 일축한다. 미국의 데스 메탈 밴드인 디어사이드의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오프의 리더 곽인호씨는 “악마숭배자인 디어사이드에게서 우리가 취하고자 하는 것은 사운드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거부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데스 메탈 음악의 가사는 대부분 현실 비판과 기성 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채워져 있다. 외국 데스 메탈 밴드의 곡은 죽음과 악령에 대한 찬양으로 일관하지만, 국내 밴드들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대변하는 내용을 노래한다. 국내 데스 메탈 밴드인 ‘아이모네드’(지옥에서 피는 꽃)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죽은 이들의 억울한 심정을 노래한다.

공포 체험 행사에 참여한 신세대들도 비슷한 반응이다. 악마와 공포처럼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관심일 뿐이지 우리 사회에서 악마주의를 행동 강령으로 삼거나 신념화한 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악마주의에 대한 비판과 걱정은 또 다른 면에서도 제기된다. 원래 악마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개념인데, 외국 대중 예술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같이 따라 들어온 것이다. 신세대가 즐기는 악마주의 문화가 외국 문화 베끼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문화 평론가 김성기씨는, 사회 현실에 대한 저항을 하필이면 서양 대중 음악을 통해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또 지금은 가사 내용과 악마주의 행동 강령이 수용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국내에 들어올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데스 메탈을 예로 들자면, 데스 메탈이 보이는 파괴적인 사운드와 기괴한 분위기가 이미 들어왔듯이 가사와 악마주의 행동 강령도 언젠가는 신세대 사이에서 퍼져 나가리라는 것이다. 데스 메탈 밴드 아이모네드의 보컬 박용민씨는 “아직은 사회 분위기가 악마주의 가사와 행동 강령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사회 분위기가 더 암울해지거나 혼란이 가중되면 언제가는 국내에 상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악마주의가 완전히 국내에 들어오느냐 마느냐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성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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