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벨트를 파먹는 정부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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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시설물 마구 건설, 별장·골프장 ‘우후죽순’…편파 행정에 주민만 희생
지난해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 조성된 대단위 아파트단지(행신지구)에 입주한 이창호씨(39)는 결혼 8년 만에 이룬 내집 마련의 꿈이 올해 들어 분노로 바뀌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아파트단지 바로 코앞에 난데없이 경부고속철도 기지창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38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개발제한 구역의 땅, 이른바 그린벨트 지역이다.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싸 서울에서는 내집 마련을 포기한 채 ‘전원 아파트’라는 홍보 하나만 믿고 이곳에 입주한 이창호씨는, 고속철도 기지창 건설이 알려진 뒤 속았다는 생각으로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는 다니던 직장까지 쉬면서 고속철도 기지창 건설 반대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미 입주를 끝낸 3만여 주민은 동별로 대책을 숙의한 뒤 ‘그린벨트내 기지창 반대’ 기치 아래 모였다. 그동안 다섯 차례나 반대 집회를 열고, 각계에 그린벨트 훼손 반대 진정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사업 주체인 건설교통부 산하 고속철도건설공단측은 마땅한 부지를 찾기 어렵다며 건설을 강행할 태세이다.

대규모 그린벨트 파괴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고양시 행신지구만이 아니다.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주민들도 요즘 서울시의 대규모 그린벨트 잠식 계획을 규탄하고 나섰다. 강서구 공항동과 강동구 둔촌동을 잇는 지하철 9호선을 건설하면서 차량 기지창을 그린벨트 지역인 하남시 감북동 일대 7만여 평에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 천여 명은 이에 대응해 ‘기지창 건설 반대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각계에 진정서를 돌리고 있다. 주민 대표 박인대씨는 “정부가 지난 24년 동안 이곳 주민들의 온갖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도시 확산 방지와 녹지 제공이라는 그린벨트 취지를 내세우며 국가 시책에 따라 달라고 설득해 놓고 이제 와서 슬그머니 그린벨트를 자진 훼손하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다. 기지창이 들어설 바에야 불이익이 계속될지라도 차라리 그린벨트로 남게 해 달라는 것이 주민들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린벨트 지역에 대규모 시설을 들여놓으려는 정부 사업이 증가하면서 주민들과의 마찰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건설교통부에 신청된 30만평 이상 대규모 그린벨트 훼손 요구는 모두 10여 건, 4천2백5만평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대부분 정부와 산하기관 등 공공부문에 의한 훼손 요구이다.

더구나 지방 선거까지 앞두고 있어 그린벨트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곧 해제될 것’ ‘얼마 안가서 규제가 더욱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팽배해 있다. 이런 심리는 정부가 앞장서서 그린벨트를 훼손하면서 더욱 부추겨지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시 전체 면적의 98.4%가 그린벨트에 속해 있는 하남시의 도시과장은 “주민들은 민선 시장의 선택 기준을 그린벨트 해제 정책에 놓고 벼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가 사무인 그린벨트 문제를 민선 시장과 의회가 반드시 걸고 넘어지려 할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정부 ‘개발 허용’ 위주로 전환한 듯

그러나 정부는 내부적으로 이미 그린벨트 관련 정책을 ‘개발 허용’ 위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5월 초 건설교통부 주최로 열린 도시계획법 개정 방향 내부 토론에 초청 받아 참석했던 한 인사는 “그린벨트 규제를 더욱 완화하고, 앞으로 더 많은 허가 권한을 지방자치 단체에 이관하는 게 불가피하리라는 내용이 주로 논의됐다”라고 토론 분위기를 전한다.

국토 관리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한국의 그린벨트는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추진되던 71년에 처음 지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도시 확산을 억제하고 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도시계획법을 제정해 여러 규제 장치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71년 7월30일 서울 외곽을 중심으로 수도권의 463.8㎢가 개발제한 구역으로 지정된 것을 시작으로 77년까지 전국의 14개 권역 34개 도시에 5천300㎢ (약 16억3천만평)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그린벨트는 본래 취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시행 초기의 졸속 지정, 편파적 관리 행정 등으로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당초 대통령 지시에 따라 갑자기 획일적으로 선을 그었기 때문에 자연부락 등 주거 밀집 지역이 많이 포함됐고, 심한 경우 마을이나 건축물 중앙으로 선이 통과하기도 했다. 재산권 행사를 제한 당한 거주민들의 반발과 불만이 끊일 날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이 과정에서 감독을 소홀히 했거나 금품을 받고 훼손을 눈감아준 공무원이 무수히 다쳤다.

특히 그린벨트내 행위 허가를 법으로 정한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의 무원칙한 개정은 그린벨트를 파괴한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행규칙은 처음 제정된 77년 8월부터 지금까지 무려 40여 차례나 개정됨으로써 누더기처럼 변했다. 물론 그때마다 정부는 그린벨트내 주민들의 민원을 들어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로 선거철마다 정부·여당의 선심용으로 조금씩 풀려나가는 식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그린벨트 규제 완화로 인한 혜택은 정작 피해 주민보다는 일부 특권층과 정부 기관 몫으로 돌아간 측면이 컸다.

이같은 사실은 그동안 훼손된 그린벨트의 95%가 정부가 주도한 공공부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 그린벨트 지정 이후 약 20년 동안 역내 거주민은 화장실 하나 개조할 수 없이 살아야 했던 반면, 그 기간에 경관이 뛰어난 그린벨트에는 일부 특권층의 호화 별장 꾸미기가 버젓이 허용되기도 했다(72~73쪽 기사 참조).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부유층의 편법적인 그린벨트 잠식은 호화 별장에 그치지 않았다. 건설교통부와 경기도의 집계에 따르면, 수도권 그린벨트의 경우 54.6%를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5천평 이상 토지 소유자는 모두 3천5백97명이다. 이들이 소유한 땅은 수도권 그린벨트 전체 면적 3억9천4백만평의 18.3%인 7천2백만평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들이 소유한 땅의 대부분은 경기도 성남시 고양시의 분당·일산 지역과 남양주시·광주군·용인군 등 경관이 수려한 지역 및 투기 대상 지역에 몰려 있다(73쪽 표 참조). 이들이 그린벨트 지정 후 취득한 토지를 용도 별로 살펴보면 임야가 전체 그린벨트 임야 면적의 61%로 임야에 대한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대규모 임야에 대한 선호도는 골프장 조성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90년대 들어서는 그린벨트 지역에서 골프장을 확장했거나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경기도 양주군의 로얄골프장(동원탄좌 이 연 회장 소유)은 90년 3월 그린벨트 8천평을 훼손해서 9홀을 증설했다. 금년 들어서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한양골프장(이사장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이 그린벨트 약 13만평에 골프장을 신설하겠다고 허가 신청서를 냈다. 이에 대해 고양시는 처음에 허가 방침을 정했으나 고양시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계류하고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놓고 보면 그린벨트 지역 주민들의 생계 유지형 무허가 시설물이나 소규모 불법 훼손은 ‘바늘 도둑’에 비유할 만하다. 그마저도 단속의 손길은 늘 이들에게만 미쳤고, 적발되는 즉시 원상 회복 당한 뒤 벌금을 물어야 했다.

특권층에 의한 그린벨트 잠식 외에 정부가 주도하는 그린벨트 훼손도 심각한 실정이다. 물론 정부는 그동안 공공 시설이 훼손한 그린벨트가 모두 국민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것들이었다고 해명해 왔다. 도로·상수도·하수도·군사시설 등이 주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린벨트를 잠식한 정부 시설물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우선 서초구 우면동 그린벨트내 임야 지역에 건물 면적의 42배나 되는 녹지를 깔고 들어앉은 한국교육개발원 건물은 아무리 교육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더라도 정부의 그린벨트 보호 의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통일원 연수원 건물도 마찬가지다. 서울 도봉구 수유동의 북한산국립공원에 들어서 있는 이 건물의 부지 1만6천8백70평 가운데 절반인 7천7백평이 국립공원 부지이자 그린벨트이다. 오는 9월 완공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서울 강남구 세곡동 대모산 기슭의 안기부 청사(17만5천7백50평)도 비슷한 예이다.

정부가 14년간 2천2백86만평 훼손

그밖에 철도청의 서울남부철도화물기지, 강남시립아동병원, 마사회의 과천 승마경기장과 고양시 종마보급사육시설, 서울 공릉동 한국전력연수원, 태릉사격장, 고양시 농협전문대, 경기도 시화공단, 과천시 남서울대공원, 남태령의 군부대, 미사리 조정경기장도 그린벨트를 차지하고 들어서 있다. 이처럼 정부 시설물들이 앞다투어 그린벨트를 차지하는 바람에 그린벨트는 80년 이후 93년 말까지 14년간 서울 여의도 면적(87만6백평)의 26배에 달하는 무려 2천2백86만4천평이 정부에 의해 훼손됐다.

정부 각 부처가 그린벨트를 ‘눈먼 땅’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건설교통부 도시계획과의 한 관계자는 “정부 각 부처가 공문서로 요청한 그린벨트 훼손 허가 요청 가운데 굵직한 것만도 최근 1년 동안 40건이 넘어 골머리를 앓는다.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언론이 견제를 좀 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건설교통부조차 부처 통합 이전인 건설부 시절에 그린벨트 지역내 설치에 반대해 왔던 산하 고속철도건설공단의 경부고속철도 기지창(고양시 강매동 일대 38만평)과 남서울 시발역(서울시 일직동 11만평)을 지난 3월31일 각각 그린벨트 지역에 건설하도록 승인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부처들도 선거를 앞두고 뒤질세라 그린벨트를 흔들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노인전용주택단지 및 장례식장’을, 환경부는 ‘쓰레기 처리장’을,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은 ‘중소기업물류단지’를 그린벨트 내에 설립하도록 해달라고 건설교통부에 요청했다. 심지어 사할린 한인문제 관계부처 대책회의조차 시흥시 수암동 그린벨트내 임야 4만1천평에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아파트’를 건립하겠다고 나섰다.

바로 이런 실정 때문에 그린벨트 지역 주민들은 끊임없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일부 특권층과 정부가 앞장서서 그린벨트를 훼손하는데 정작 재산권을 가진 자기들만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분노를 키웠다고 볼 수 있다(76쪽 기사 참조). 정작 큰 문제는 정부와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그린벨트 잠식이 환경 보전 의지를 잠재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이정전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는 “심각한 불공평 문제는 그린벨트가 곧 없어지리라는 기대를 조장했다. 피해 주민 다수의 그런 기대가 그린벨트 제도 그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까지 성장했다”라고 진단한다.

박정희 정권을 독재 정권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린벨트 제도만은 가장 돋보이는 정책 사례라고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그만큼 한국의 그린벨트 제도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그린벨트는 국민 모두가 혜택을 받는 최소한의 ‘허파’이다. 그린벨트의 미래를 계속 불확실한 상태로 방치한다면 그 결과는 멀지 않아 우리와 후손에게 재앙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이 환경 전문가들의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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