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엇갈린 속셈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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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한 관계 개선 견제·중국 봉쇄 위한 북한 전진 기지 화 ‘동상이몽’…남북 신뢰 구축 없이 성과 기대 어려워
지난 7월1일 오전 광화문 앞 정부종합청사 6층에 위치한 외무부는 모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특히 4자 회담 추진 사령부인 북미국에는 흥분감마저 감돌았다. 바로 하루 전에 북한 당국이 남북한·미국·중국이 참여하는 4자 회담을 위한 예비 회담을 8월5일 뉴욕에서 개최하는 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4자 회담은 작년 4월16일 제주도 한·미 정상회담에서 제안된 지 무려 14개월여 만에 성사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무엇보다도 북한 당국이 4자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식량 지원 요구를 철회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뉴욕 예비 회담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본회담까지 성사될 것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북한이 끝까지 ‘선 식량지원 후 4자 회담’을 고수할 경우 이를 한국 정부가 예비 회담에서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본회담 성사 여부가 판가름난다.

물론 한국 정부가 예비 회담에서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동안 북한이 4자 회담에 참여하면 식량 지원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4자 회담에 승부를 걸고 있는 한국 정부로서는 북한의 요구를 무작정 거부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예비 회담에서 북한은 본회담 참여를 약속하고 한국은 본회담이 성사되면 식량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이면 합의가 체결될 공산이 높다.

사실 북한이 전격적으로 4자 회담의 예비 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은 그만큼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서 북한으로서는 한국 정부의 식량 지원이 있어야만 4자 회담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더 이상 고수하기 힘들 정도로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중국에서 북한 당국자들을 접촉했던 한 소식통은 정무원 간부조차 한 달에 20일치 식량밖에 배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이 뉴욕 예비 회담에 참여하기로 한 배경이 어디에 있든, 외무부는 그동안 정부 차원의 식량 지원을 하루속히 해야 한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식량 지원을 4자 회담에 연계해온 데서 말미암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게다가 식량 지원이라는 ‘미끼’가 당초 4자 회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북한을 4자 회담에 끌어들이는 훌륭한 ‘협박용’ 지렛대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외무부는 만족해 하는 듯하다.
대북 경수로 사업의 ‘비극’ 되풀이될 수도

그렇지만 상당수 국내 북한 전문가들은 외무부와 달리 4자 회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설령 대북 식량 지원을 대가로 4자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전문가는 심지어 이런 비유를 한다. “몹시 사귀고 싶은 여자의 집안이 곤궁하다면 조건 없이 도와주면서 신뢰를 얻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도와줄 테니 사귀자고 하면 어느 여자가 응하느냐.”

다시 말해서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으로 하여금 식량난을 타개하도록 조건 없이 식량을 지원한 뒤 그에 따른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경제·군사 측면에서 남북 관계의 개선을 추진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 대북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4자 회담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식량 지원을 한다면 설령 4자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북한과 신뢰를 구축하기 어려워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북 전문가들이 더욱 우려하는 것은 북한이 정말로 ‘사귀고 싶은 남자’는 미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대규모 식량 지원을 4자 회담과 연계하는 것은 자칫 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미국에게만 좋은 일이 될 공산이 크다. 43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한국이 댔으면서도 미·북한 관계 개선만 촉진한 대북 경수로 지원 사업의‘비극’을 4자 회담이 재연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4자 회담에서 미·북한 관계 개선에 드는 비용을 미국 대신 한국이 부담해야 하는, 이른바 ‘봉’이 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미국은 4자 회담에서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금지하는 협약을 맺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미사일이 북한 제 1의 수출 품목인 이상 그 수출을 금지시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비용을 북한에 지불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를 한국에 떠넘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4자 회담은 자칫 남북 관계 개선보다는 오히려 미·북한 관계 개선만 도와줄 ‘제 2의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 사태’가 될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왜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민족 문제를 남북한 당사자간 대화가 아니라 구태여 4자 회담이라는 틀로 풀려고 나섰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4자 회담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주도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물론 외무부로서는 4자 회담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 대해 나름의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갖추고 있다. 4자 회담이 제안되기 전인 작년 4월 초 북한이 정전협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는 등 긴장이 고조된 적이 있다. 이용준 북미 1과장에 따르면, 정부는 당시 북한과 대화가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느냐 아니면 미·중이 참여한 4자 회담으로 북한을 끌어 낼 것이냐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무부는 4자 회담의 본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철저히 남북한 당사자 해결 원칙에 입각해서 회담을 진행해 나갈 방침이다. 이과장은 ‘아직도 남북한간 직접 대화가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외무부는 무엇보다도 남북한 당사자가 가장 중요한 의제인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중국은 단지 이를 보장하는 이른바 2+2 구도로 4자 회담을 진행할 계획이다.

지난해 초 북한이 정전 협정을 미국과의 평화 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한국과 대화를 피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4자 회담을 제안한 배경에는 북한과 관계 개선을 급진전시키고 있던 미국의 발목을 잡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또다른 전문가의 지적이다. 그의 주장은, 당시 미국과 북한이 연락사무소 개설과 미군 유해 반환 협상을 통해 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한국을 긴장시켰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이와 같은 주장을 더욱 뒷받침하는 근거는 작년 4월16일 제주도 한·미 정상회담 직후 정부가 4자 회담이 제안된 만큼 앞으로는 미·북한간의 어떠한 접촉에도 간섭 혹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정부의 입장 표명은 4자 회담 제안이 미·북한간 다각적인 접촉과 그에 따른 양국 관계의 급속한 진전에 자극받았음을 완곡하게 드러낸 것이다.

처음 4자 회담을 입안했고 현재도 회담 성사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인물은 유종하 외무부장관(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유명환 외무부 북미국장이다. 당시 두 사람은 남북 관계라는 민족 문제를 4자 회담으로 국제 문제화하는 중대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통일원·외무부 및 국가안전기획부 실무 관계자들로부터 의견을 거의 수렴하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통일원이 4자 회담 입안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는 대목과 관련해, 통일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4자 회담을 제안할 당시 이를 통일원에서 권오기 부총리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4자 회담이 외교 사안인 것은 사실이지만 회담 목적이 남북 관계 개선인 만큼 당연히 통일원이 입안 과정에 참여해야 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은 정부의 통일 정책 결정 과정이 파행적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남북한이 중심 되는 2+2 구도로 진행해야

이를 위해 외무부는 본회담 의제를 구체적으로 확정하고 의제 별로 2+2 회담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 미사일 수출 통제 협상도 미국에 맡겨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삼성경제연구소 북한 전문가인 동용승씨는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지 않게 될 경우 그 대가로 한국이 돈을 댄다면 반대 급부로 다른 사안에서 북한의 양보를 얻어내는 협상 전략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사되더라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몇 년이나 걸리는 4자 회담은 장기 프로젝트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대신 빠른 시일 에 북한과의 신뢰 구축을 목표로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식량 지원과 본격적인 경협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래야만 4자 회담도 남북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 성공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4자 회담은 미·북한 관계의 급속한 진전을 막으려는 한국 정부의 판단과 남북 관계 개선을 일정 측면 통제하려는 미국의 상충되는 이해가 얽혀서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4자 회담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 포함된 상호불가침조약 등 주요 합의 사항들을 조속히 이행하기 위해 4자 회담이 기여할 수 있다는 외무부 이용준 북미1과장의 전망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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