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전쟁, OB는 역전 당하는가
  • 金尙益 기자 ()
  • 승인 1995.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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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트·카스와 30개월 ‘술 전쟁’ 5 대 5 상황…신제품 쏟아내 점유율 높이기 안간힘
프로 야구 원년 우승팀 OB베어스의 94년 성적은 7위였다. 꼴찌를 간신히 면했을 뿐, 8위 쌍방울과의 승차는 4게임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야구단 ‘주인’인 OB맥주 역시 그 해 사상 최악의 시즌을 고통스럽게 견뎌야 했다. 92년까지만 하더라도 70%를 웃돌던 OB맥주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94년 9월 57.5%로 곤두박질했다.

그로부터 1년 뒤. OB베어스는 올해 페넌트 레이스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롯데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옛날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러나 OB맥주의 형편은 영판 달랐다. 하이트 맥주와 카스 맥주가 연속 안타를 터뜨리는 바람에 ‘역전’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진로의 신규 참여로 과거처럼 어느 한 회사가 시장의 70%를 독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OB측도 이 점을 잘 안다. 그러나 60%는 지킬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것마저 무너진 OB의 마지노선은 50%이다.

그렇다면 OB의 막강 타선이 침묵을 지키고, 믿었던 마운드마저 난조를 보여 절체 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OB 벤치는 어떤 작전으로 국면 전환을 유도할 것인가?

미시족 2백명, 하이트 판촉 맹활약

93년 5월 하이트 맥주가 출시된 이후 30개월 동안 가열되어 온 동양·조선·진로 3사의 장기 레이스는 지난 10월20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과 매우 닮았다. 이 날 경기에서 OB는 2회 말까지 4 대 0으로 크게 앞섰으나 연속되는 실책 때문에 동점을 허용하고 연장전에 들어갔다.‘95 맥주 시리즈’는 OB와 롯데가 동점을 이룬 9회 말 상황에 비길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80년대 초반까지 동양맥주(OB)와 조선맥주(크라운)는 국내 맥주 시장을 6 대 4 비율로 나눠 가졌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두 회사 간의 격차는 더 벌어져 7 대 3이 됐다. 조선맥주가 하이트 맥주를 선보인 93년 5월 직전의 상황은 조선맥주로서는 최악이었다. 이 회사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당시 최고위 경영진에게 7 대 3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 시장 점유율은 27~28%였을 것이라고 실토한다.

91년 초 페놀 사태가 터졌을 때 반짝 호황을 누린 적도 있었지만, ‘만년 꼴찌’조선맥주가 수십 년간 당해온 압박과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컨대 술집 개업식에 크라운 맥주 지점장(부장급)이 찾아가도 뒤늦게 OB 맥주 담당(평사원 또는 대리급)이 나타나면 술집 사장은 ‘중요한 손님이 왔다’며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도매상에서도 푸대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크라운 직원이 찾아가면 OB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장은 이렇게 호통쳤다.‘야, 크라운! 여기 뭣하러 왔어. 밖에 나가서 맥주짝(상자)이나 날라.’

야구에서는 어이없는 실책 하나가 다 이긴 게임을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4 대 0으로 앞선 OB의 3회 초 수비가 그랬다.

창사 60주년을 맞은 조선맥주는 타격이 부진한 4번 타자 크라운 대신 그동안 사활을 걸고 몰래 키워온 신인 하이트를 타석에 내보냈다. 하이트는 알콜 도수 4.5도에 비열처리 제조 방식으로 생산된 고급(서브 프리미엄) 맥주였다. 당시 국내 맥주 시장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OB와 크라운으로 대표되는 열처리 대중주였다.

조선맥주는 비열처리로 차별화한 선두 타자 하이트를 1루에 내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한 예로, 중산층이 몰려 사는 아파트 단지를 집중 공략 대상으로 삼아 홍보용 맥주를 계획적으로 뿌렸다. 예컨대 1, 3, 5, 7, 9 홀수 동의 2, 4, 6, 8, 10 짝수 층을 선택한 뒤 층별로 1, 3, 5, 7, 9 홀수 호에 2병씩 공짜로 나눠주는 식이었다. 누구는 먹고 누구는 못 먹는 일이 생기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효과가 생겼다.

이름이 알려졌어도 도매상에서 외면하면 곤란하므로 어떻게든 주문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이 급했다. 물건이 없어서 못팔 정도로 제품의 힘이 강했던 동양맥주는 도매상에 얼마든지 밀어내기(push) 영업을 할 수 있었지만, 영업력이 허약한 조선맥주로서는 언감 생심이었다. 그래서 끌어당기기(pull) 전략을 폈다. 판촉 요원으로‘미시족 아줌마’ 2백명을 선발해 수도권의 구멍가게와 슈퍼마켓에 전진 배치했다. 마케팅 레이디라고 이름 붙여진 이들은 신제품을 홍보하고 진열대를 정리해 주는 등 어떻게 해서든 도매상에 주문을 하도록 소매점주를 끌어당겼다.

94년 6~8월 OB의 시장 점유율은 60~61%로 떨어졌다. 하이트를 ‘고졸 연습생’쯤으로 여기고 방심했던 OB 벤치는 당황했다. 여기에 카스까지 등장해 OB의 시장 점유율은 50%대로 추락했다.

결정적인 것은 물이었다. ‘맥주를 끓여 드시겠습니까?’‘왜 물은 가려 드시면서 맥주는 가려 마시지 않습니까?’하이트 광고는 OB의 아킬레스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 공격적인 광고 문안에 OB는 곤욕을 치렀다.

물에 대해서 OB측은 할말이 많다. 맥주는 원료인 맥아·호프·물을 섭씨 200도로 끓인 뒤(당화 또는 담금 공정), 발효·숙성·여과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여과 과정에서 섭씨 30~60도로 열을 가해 효모를 죽인 것을 열처리 맥주, 열을 가하지 않고 효모를 걸러내는 것을 비열처리 맥주라고 부른다). 희석식 소주처럼 물에 알콜 원액을 섞는 것이 아니라 물을 고온으로 끓이기 때문에 맥주에서 물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하이트의 마케팅·광고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해 하이트는 93년 5월까지도 70%를 웃돌던 OB맥주의 시장 점유율을 그해 12월 66.6%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히트 상품으로 떠오른 하이트는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망년회 시즌에 불붙은 하이트 타선은 94년 들어서 더욱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맥주 성수기인 94년 6~8월 OB의 시장 점유율은 60~61%로 추락했다. 하이트가 처음 나왔올 때 ‘고졸 연습생’쯤으로 여기고 방심하던 OB 벤치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OB, 에이스 ‘ICE’ 조기 투입했다 실패

한국시리즈 5차전 3회 초 수비에서 3루수 악송구로 선두 타자를 2루로 내보냈듯이 OB는 여기서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에이스 투수를 ICE 맥주로 성급하게 교체한 것이다.

ICE 맥주는 캐나다에서 인기를 끈 아이스 공법을 도입해서 만든 것으로, 이를테면 ‘유학파 투수’였다. ‘이에는 이, 비열처리에는 비열처리.’ OB 벤치는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그러나 OB의 새로운 에이스는 벤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5차전 3회 초 1사 1, 2루에서 OB 투수가 피처 보크를 범했듯이, 설상 가상으로 OB맥주는 광고 전략에서 큰 에러를 범했다. 동양맥주는 ICE를 출시하면서 인기 영화 배우 강수연을 모델로 선정했다. ‘세계적인 맥주에 세계적인 스타 강수연을 동원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광고는 소비자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94년 4월30일 <스포츠 서울>에 무려 22쪽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광고를 게재한 것도 역효과를 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94년 6월 진로가 카스 맥주를 선보인 것이다. 진로는 미국 비열처리 맥주의 대표 선수인 쿠어스맥주와 합작해서 카스라는 ‘용병’을 국내 리그에 진출시켰다.

진로는 미국 메이저 리그의 대형 타자 카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큰 돈을 들였다. 생산 설비를 갖추는 데만 해도 다른 회사의 2~3배에 이르는 3천억원을 들였다. 소주를 70년 동안 팔아왔지만 맥주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초짜’였던지라 투자 부담은 더 컸다. 한 예로 맥주병과 궤짝을 전부 새로 만들어야 했으며, 이를 전국 소매상에 풀어놓는 데도 만만찮은 돈이 들었다(기존 맥주사의 공병 회수율은 95%에 이른다).

영업도 새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과거 진로소주가 맹위를 떨칠 때는 끼워 팔기 같은 방법도 통할 수 있었지만, 경월소주를 인수한 동양맥주의 그린소주가 수도권에서 강세를 보이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진로 벤치는 잃을 점수는 미련없이 내주고 대신 득점 기회에서는 철저히 점수를 올린다는 작전으로 수도권을 집중 공략했다.

동양맥주는 언제든지 신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조선맥주는 하이트를 밀어붙이는 단일 브랜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진로는 내년 여름 시즌에 새로운 맥주를 내놓을 태세다.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카스는 광고 전략에서도 손해를 보았다. 미국 본토에서 쿠어스맥주는 ‘로키 산맥의 물로 만든다’는 것을 강조하는 광고 전략을 펴고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하이트가 써먹은 수법이었으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비열처리 맥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신세대를 겨냥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다행히 앞 타자인 하이트가 국내에 비열처리 맥주 시장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카스는 하이트가 닦은 길을 수월하게 질주할 수 있었다. 카스는 출시 3개월 만에 10%를 웃도는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다.

이제 OB의 새로운 에이스 ICE의 실패는 분명했다. OB 벤치는 ICE를 강판시켰다. 동양맥주측은 지금도 ICE의 제품력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유럽풍의 강한 맛을 지닌 ICE는 부드러운 맛을 선호하는 한국 사람의 입맛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 상조’였다고 아쉬워한다. 투수 교체가 너무 빨랐는지 모른다.

하이트와 카스의 타선이 기세등등하던 94년 10월 OB 벤치는 새로운 구원 투수로 NEX를 내세웠다. 그러나 94년 12월 OB의 시장 점유율은 55.4%로 더 떨어졌다.

OB의 난조는 95년 시즌에도 계속되었다. OB 벤치는 고민에 빠졌다. 이 때 떠오른 것이 ‘멀티 브랜드 전략’이다. 외부의 성공 사례에서 배우는 ‘벤치 마킹’을 시도한 것이다.
하이트·카스 타봉 막은 ‘5인의 소방수’

OB의 스승은 일본의 기린맥주였다. 기린맥주는 80년대 후반 ‘드라이 맥주’를 먼저 개발한 아사히맥주에게 시장 점유율을 무려 10%나 빼앗겼다. 고전하던 기린맥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린 라거’ 등 신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는 멀티 브랜드 전략을 폈다. 기린맥주는 5% 가량을 만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후발 주자가 히트 상품을 냈을 때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은 손해다. 오히려 비켜 가면서 신제품을 줄기차게 내보내는 멀티 브랜드 전략이 효과적인 공략법이다.’이것이 그동안의 시행 착오 끝에 OB 벤치가 얻은 교훈이었다.

멀티 브랜드 전략에 따라 95년 7월 서브 프리미엄 맥주인 ‘OB라거’와 슈퍼 프리미엄 맥주인 ‘카프리’가 등장했다. 선수층이 두터워진 동양맥주는 OB맥주·ICE·NEX를 포함해 모두 다섯 종을 시장에 내놓았다.

멀티 브랜드 전략의 목표는 뚜렷하다. 소비자가 선택할 폭을 넓혀서, 쉽게 말해 입맛을 다양화함으로써 어느 특정한 맥주가 독주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조선맥주나 진로는 현재 타율이 높은 단 한 명의 타자만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이들의 타율을 끌어내리려는 것이 동양의 작전이다.

이같은 OB 벤치의 작전은 어느 정도 먹혀 들었다. ‘5인의 소방수’는 전력 투구해 하이트와 카스의 타봉을 일단 틀어막았다. 아직 등판한 지 백일 정도밖에 안된 OB라거는 확실한 팀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하이트나 카스도 OB라거를 만만치 않은 상대로 인식하고 있다.

하이트 맥주가 나온 이후 맥주 시장에서는 장장 30개월에 걸친 페넌트 레이스가 펼쳐졌다. 선두 주자 OB맥주와 후발 주자 올스타팀(하이트·카스)은 서로 치고받는 격전 끝에 동점을 이루어 연장전에 들어간 상황이다.

95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OB는 연장 10회 투수의 폭투가 빌미가 돼 롯데에 1승을 바쳤지만 6·7차전을 내리 이겨 우승을 거머쥐었다. OB는 ‘맥주 시리즈’에서도 그같은 행운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OB라거의 상승세에 고무된 동양맥주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신인 선수(신제품)를 계속 발굴해 멀티 브랜드 전략을 확대할 구상을 갖고 있다. 한편 조선맥주는 당분간 하이트를 밀어붙여 타율을 더 끌어올린다는 단일 브랜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조선맥주는 이미 신제품을 개발해 놓고 있으나 상대의 멀티 브랜드 전략에 말려들어 섣불리 내놓았다가 그것이 자칫 하이트 시장을 잠식할지 모른다는 위험을 우려하기 때문이다(조선맥주는 아예 회사 이름까지도 하이트맥주로 바꾼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시장 점유율 20%를 노리는 진로는 그 목표가 달성되면 당장 내년 여름 시즌에라도 신제품을 내놓을 태세다.

10~11월은 맥주 비수기이다. 맥주 전쟁의 연장전은 96 시즌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전에 또 한판의 싸움이 남아 있다. 술자리가 잦은 연말 연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프로 야구에서도 ‘스토브 리그’가 벌어진다. 선수 스카우트와 동계 트레이닝 같은 스토브 리그 결과는 다음 시즌의 성적을 좌우한다. 96 시즌으로 넘어간 맥주 연장전의 승패도 올 겨울의 스토브 리그에 달려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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